날씨가 너무 화창하다. 이런 날 집에 있는 건 자연이 준 선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최근 며칠 바쁜 일정을 보냈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쉼에도 바쁜 건 왜일까? 빈 넋두리고 괜한 푸념이다.주부의 일은 끝이 없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만 자꾸 신경이 거슬려 결국은 하게 되는 집안일, 또 잠시 벗어나 보리라.
백제의 숨결이 흐르는 공주로 갔다. 공주의 구도심을 가로질러 금강으로 가는 제민천을 끼고 있는 노천카페로 갔다. 요즘은 도심의 중심에 있는 하천을 끼고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 많다. 이곳 역시 다소 지저분할 수 있는 공간을 깨끗이 정비하고 그 경계에 의자와 티테이블을 설치해 놓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앉아서 쉬거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노상 카페였다. 아, 이렇게도 문화공간을 만들 수 있구나!하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공간이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가끔 그 사이를 지나가는 자동차들, 전혀 정제되어 있지 않은 노천카페의 모습이 낯선 듯 익숙했다. 외국의 자유로운 풍경들이 이미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가까이에 와 있었다. 3층에는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무인판매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1층에서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거나 멍 때릴 수도 있다. 굳이 책을 사지 않아도 된다.자유로운 사색의 공간이다.
커피를 마시고 나와 풀꽃문학관으로 갔다. 옛날 일본식 건물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나태주 시인의 문학관이었다. 들어가는 담벼락에 쓰인 삐쭉빼쭉한 글씨의 시구부터뭔가 순수함으로 남다르게 다가든다.작지만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풍경과 작은 뜨락에 핀 야생화가 왠지 모르게 과거로의 회귀감도 느끼게 해 준다. 모든 것들이 꾸민 듯 꾸며지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비쳐 평화로웠다.
실내로 들어갔다. 오래된 풍금 앞에 펼쳐져 있는 낡은 동요집, 삐걱거리는 나무바닥이 그 옛날 교실에서의 추억을 소환하게 한다. 흑백의 사진들이 나태주시인의 걸어온 길을 말해주고 있다. 어느 한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이 그곳에 나타나서 풍금을 켜고 우리들은 다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를 것 같은 환상에 잠시 사로잡혀 본다. 작가님은 가끔 이곳에서 시작활동도 하신다고 하니 운이 좋으면 그분을 만날 수도 있다고 한다. 오늘은 안 계시는지 조용하다. 한 바퀴 돌고 그분의 대표작인 "풀꽃" 시구가 가슴에 다가들어 잠시 멈춤 해 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살아오면서 놓치고 지나간 부분이 없나 돌아본다. 욕심내어 그르친 것은 없는지, 누구에게 상처 준 적은 없는지, 내 무심함을 탓해보며 문학관 비탈길을 내려왔다. 자세히 읽어보지 못한 시가 보인다. 익숙한 시 "선물"이다.그 시도 오래 되새기며 읽어보니 내용도 사랑스럽다. 그래, 세상만물이 유. 무형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두면 모두가 의미가 있고 사랑스러운 법이다. 감사할 뿐이다.
하늘아래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오늘이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후략)
먼 미래를 보기보다는 오늘에 충실하고, 나를 사랑하고, 곁에 있는 지기들을 사랑하리라. 아름다운 시를 가슴에 담고 문학관을 나와 황새바위 성지로 향했다. 유난히 벚꽃이 아름다운 곳이다. 원래 이곳은 황새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 유래에서 비롯 했다는 통설도 있지만.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邪學罪人)'의 죄목으로 목에 '항쇄'라는 형구를 두르고 끌려 나와 이곳에서 처형을 당했다는 유래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긴 돌계단을 올라가 돌문을 지나면 커다란 광장이 나온다. 12사도를 상징하는 빚돌을 지나 만난 커다란 순교탑이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며 죽어간 순교자들의 넋을 위로해주고 있다. 우리가 간 날은 벚꽃이 만개하여 그날의 슬픔을 화사한 꽃으로 위로하듯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순교자들의 피눈물이 예쁜 꽃비로 승화하였듯 온화하고 포근하게 광장을 감싸고 있었다. 가을에는 단풍 또한 아름답다고 하여 많은 천주교신자들이 성지순례길에 오르는 곳이라 한다. 잠시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며, 가슴 저 밑바닥에 신자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에 죄스럽기 그지없다.
요즘은 발길 닿아 나서는 곳마다 역사가 있고 우리네 삶의 진면모를 볼 수가 있는 곳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동안은 바쁘다는 이름으로 관심 갖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자연의 아름다움도 문화의 빠른 발전 앞에 이유 없이 뒷방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 이제 이러한 것들이 또 다른 선각자들 눈으로 새롭게 재조명되어 탄생되어지고 있다. 문화마을, 벽화마을이 그렇듯, 꽃 축제장이 그렇듯, 새로운 건축양식이 그렇듯...
멀리 보이는 공산성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계획 없이 나선 길이라 그곳까지 가기엔 시간이 턱없다. 언젠가 축제기간에 올랐던 공산성에서의 백제문화 재현에 참여했던 기억이 어설프게 떠오른다. 다시 한번 참여해 내 기억 속에 백제의 숨결을 꼭 잡아 매어 두리라.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에 가면서 들러보리라 마음먹으니 벌써 내 마음이 공주의 가을 들판을 달리고 있다. 영평사의 조용한 산사음악회의 전율이 내 마음에 흐르고 있다. 올가을 다시 오리라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