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길을 걷다.

등산(무주 구천동)

by 바다나무

일과 운동은 다르다. 흘리는 땀냄새부터 다르다고 한다. 오전만 정원을 돌보고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노동이 아닌 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좋아하는 정원 가꾸기이지만 풀을 뽑고 나면 허리가 아프다. 신체의 특정 부분이 아프다는 건 노동의 결과이지 운동이 되는 건 아니다. 배낭에는 얼음물과 사촌형님이 해주신 찰밥 한 덩이. 옥수수, 그리고 맛김 한봉지가 들어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은 터라 혹시 모를 허기에 대비한 비상식량이다. 중간에 아서 쉴 수 있는 엉덩이 매트는 덤이다.


매번 맛집과 카페를 찾아다니면서도 구천동 계곡은 그냥 지나갔다. 구천명의 승려가 수도하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구천동 계곡에는 어사 박문수의 전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등산길이 있다. "어사길"이다. 늘은 그곳을 걸으려 한다. 구천동 곡의 맑은 물소리와 기암괴석, 귀중한 자연 생물들이 보존되어 있는 혜의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인 청정지역이다. 초입의 계곡에는 물놀이하거나 음식을 먹는 관광객이 많지만 어사길은 조용하고 한적하다. 이곳은 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날씨는 35도가 넘어 연신 폭염주의 안내문자가 오지만 숲길에 들어서니 시원했다. 계곡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기운과 산에서 나오는 기운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쩌면 이 길은 등산길이라기보다는 산책길이다. 지난가을 가보았던 오대산 선재길과 그 느낌은 흡사하다. 단지 어사길에 는 계곡이 선재길보다 더 깊 웅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건 나만의 느낌이고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국가의 환란시 대피장소가 되거나 의병의 전초기지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깊은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 탓인지 길을 걸으니 기분이 상쾌지고 몸도 가볍 느껴졌다.


덕유산의 구천동 계곡에는 33개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 어사길은 국립공원 탐방안내소의 자연관찰로부터 백련사까지 가는 약 5킬로미터의 완만한 탐방길이다. 숲나들길, 청렴길, 치유길, 하늘길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숲, 데크, 흙, 약간의 오르막길을 20 ~30분씩 어가면 된다. 두 시간 정도면 덕유산 중턱에 있는 백련사에 닿을 수 있다. 쉬며 구경하며 관찰하면서 곡길을 따라간다. 중간중간 명소에 대한 안내판을 읽어보며 아름다운 구천동 계곡을 머릿속에 담는다. 어쩌면 덕이 많고 넉넉한 덕유산을 알아간다는 것은 내덕을 쌓고 나를 넉넉하게 만들어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생각도 들었다.


여름에는 계곡의 맑은 물이 소와 담, 폭포가 되어 시원한 경치를 이룬다. 가을에는 야생화와 낙엽수가 그 몫을 다하고, 겨울에는 하얀 설경이 멋진 곳이다. 무주 리조트 스키장도 한 몫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그저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자연을 감상하고 타박타박 걷는 것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한유 했다. 무념무상이다. 자연과 동화된다는 것이 런 것인지 처음으로 느껴졌다. 맘이 여유로우니 몸도 여유게 반응한다.


이제 높은 산의 정상탈환은 조심스럽다. 관절에 무리가 갈까 봐. 그다지 단련된 몸이 아니기에 발을 헛디딜까 봐 겁이 나기도 하다.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능한 완만한 길만 걸으려고 한다. 주변에 등산 갔다가 다리를 다친 어르신들을 많이 본 탓이리라. 반대쪽 옛 도로는 포장된 길이지만 어사길은 적당한 흙과 나무. 매트로 바닥재를 활용했기에 발이 편했다. 연세 드신 분들도 무난히 걷고 계셨다. 한참을 걷다가 중간에 쉬는 의자에 앉아서 찰밥으로 약간의 허기를 달래며 쉬었다.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계곡길을 걷다 보니 옛 생각이 났다. 덕유산은 40년 전 기숙사생활을 하는 대학친구 11명과 이웃학교 남학생 9명이 1박 2일 동안 상을 탈환한 곳이다. 산을 타본 경험도 없는 새내기 대학생들이 야심 찬 마음으로 첫여름방학에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여학생만 있던 우리 과는 이웃학교 남학생만 있는 과의 과 과팅을 했다. 우리는 무거운 텐트를 들고 갈 자신도 없었고, 칠 줄도 몰랐기에 남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엇보다 1박 하는 데 필요한 든든한 지킴이가 필요했다. 침 9명의 남학생이 같이 가기로 했다.


피서철의 북적이는 역광장에서 털썩 주저앉아 새벽열차를 타려고 기다리면서 했던 게임, 남학생의 통기타에 맞추어 손뼉 치며 부르던 노래, 돈이 없어 20명이 택시 두대로 이동한 기적 같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지금도 학동기들이 모이면 덕유산 산행을 전설 같은 추억담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젊음이 용감했고 무모했다.


당시 너무 더워서 산을 타고 내려오면서 모두들 기진맥진했다. 다시는 등산을 하지 않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러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갑자기 신천지를 만난 것 같은 환희에 찬 소리를 지르며 또 오자고 했다. 너무 물이 시원하고 맑아서 좋다고. 우리는 잠시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친구들에게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다. 그때의 계곡물은 무척 차가웠다. 잠시 맑은 물 바라보다가 그 시절을 추억했다. 지금도 물이 너무 차서 1분을 담그고 있을 수가 없다.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은 물 덕분에 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사길을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옛이야기와도 마주치게 된다. 천상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며 너럭바위에 앉아 비파를 타면서 놀았다는 비파담(제19경), 신선들이 차를 끓여 마시며 계곡의 경치를 감상했다는 다연대(제20경), 산신령 심부름을 가던 칠불산 호랑이가 낙상했다는 호탄암(제23경)야기들이 걷는데 즐거움을 주었다. 등산길에 더해지는 즐거운 스토리는 지루함을 없애고 신비함과 친근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어느덧 큰 부담 없이 만보 걷기 하는 마음으로 걸었더니 백련사에 다다랐다. 흰 연꽃이 피어있어 백련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낡은 듯한 단청이 난해하지 않고 은은하다. 조용히 변함없이 덕유산을 지켜내고 있는 넉넉함이 보이는 듯했다. 입구에 커다란 지지목에 의지해 있는 돌배나무도 천년의 역사를 말해준다. 거쳐온 세월이 힘들었는지 혼자 서 있는 게 버거워 보였다. 여름햇살 비치는 경내가 화사하다. 스님의 예불소리만 깊은 산중에 은은하게 퍼졌다. 운동도 하고 마음의 넉넉함도 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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