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집가의 초대에 응하다.

이건희 컬렉션

by 바다나무

얼마 전 "이건희 컬렉션"에 다녀왔다. 2020년 이건희 회장의 타계 후 유족은 유례없는 대규모의 문화유산과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였다. 올해는 울산, 대구, 대전, 경기, 청주, 전남 등 6개 지역에서 2만 3천여 점의 작품들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과 연계한 거점지역에서 막바지 전시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청주박물관에서 열리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와 대전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신화가 된 화가들"이라는 전시관을 방문하였다.


청주박물관에서는 (고) 이건희 회장이 수집한 서화, 청자, 백자뿐 아니라 서책, 분청사기, 불교회화, 금속공예품, 석조물 등 다채로운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정선의 "인왕제색도" 기증품이 전시되어 있었으나 우리가 갔을 때는 일정기간 전시가 끝나 이미 수장고에 보관된 상태였고, 채용신의 "화조영모도"가 전시되어 있었다.


채용신은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화가로 고종의 어진 등 초상화가로 유명하다. 이번에 전시된 그림은 꽃과 새, 나무, 동물등을 어우러지게 그린 10폭 병풍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림으로 나타내었다고 한다. 그림의 좌우에는 해, 달, 물, 바위, 사슴등이 그려져 있는데 새와 동물은 암수 한쌍으로 하되, 시선은 서로에게 혹은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 점이 특이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일월오악도와 십장생도를 연상케 한다.

대전 시립미술관에서는 한국 근현대 미술 1세대 작가인 김환기,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 이중섭의 작업세계를 조망하는 "신화가 된 화가들" 섹션을 마련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다섯 화가들은 독특한 질감과 독자적이며 전위적인 태도로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한국미술의 새로운 변화를 꾀한 "신화"로 거듭난 예술가들을 조우하게 된다. 세기의 기증이라 불리는 이번 지역 순회전은 국민들에게 고품격 문화현장을 보여줌으로 예술적 의미와 켈렉션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만났던 이중섭 화가의 은지화가 있어서 반가웠다. 산을 표현한 유영구 작가, 나무를 귀엽게 표현한 장욱진 작가, 화강암 표면 같은 우둘두둘한 질감 속에 우리네 삶을 표현한 박수근 작가, 점과 선으로 그린 추상적인 김환기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 다섯 명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김환기, 유영국), 한국 근대 최고의 화가라는(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수식어로 이미 한국현대미술을 구성하는 역사이자 신화적 존재였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미술 하면 서양미술을 연결시켰다. 그에 부응하여 당연히 마네, 모네, 피카소, 고흐, 고갱 등 알지도 못하는 미술교과서의 서양화가를 우선 떠올리고 있었다. 한국화가라면 언젠가 들른 청주 운보의 집의 김기창 화백과 그의 아내 박래현 화가를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 제주여행에서 만난 김창열 화가와 이중섭 화가가 내가 아는 예술가의 전부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의 일과를 아끼는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는 수집가(고 이건희 회장)의 일상은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한 한 인간의 면모와 기업가로서 전통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또 다른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건희 컬렉션을 다녀오면서 미술품을 모을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춘 (고) 이건희 회장의 단순한 수집여건을 부러워하기보다는, 특정시대나 사조에 치우치지 않고 폭넓게 수집한 수준 높은 안목과 취향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분의 문화적 자긍심에 절로 고개가여졌다.


"위대한 국가는 자서전을 세 권으로 쓴다고 한다. 한 권은 행동, 한 권은 글, 한 권은 미술이다" 지나간 사건은 재현될 수 없고, 그것을 기록한 글은 왜곡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술은 과거가 남긴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미술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낳은 시대와 마주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국가의 자서전이 될 것이라는 어느 미술비평가의 말이 오늘은 가슴에 와닿는다.


어쩌면 선진국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에 적극 투자하여 세계와 인류에 자신들의 가치와 업적을 보여주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미술은 세계를 이끌어가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돈이 많은 경제인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나만 몰랐는지도 모른다. (고) 이건희 회장의 수많은 애장품들이 상속 과정에서 어떤 사연을 거쳐 국가에 기증되었는지 모르지만 지역순회 전시를 통해서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예술적 식견을 향상해 놓았음에는 틀림없다. 그림이나 문화예술품에 대해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도 관심을 가지고 전시회 초대에 응했으니까.


이건희 컬렉션 관람은 내게 정서적 감동뿐 아니라 진한 교훈도 남겨 주었다. 수집가의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감식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어록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저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 이다. 내 뼈에 찬바람이 잦아들 때쯤 내 머리는 따뜻한 지혜와 보다 넓은 안목으로 채워지길 소망해 본다. 언젠가 공부하겠다고 사다 둔 " 미술이야기"라는 에 내 눈길이 머문다. 알아간다는것이 행복하다. 역시 배움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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