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0.5도씨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한 권의 책이 나왔다.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조심스레 저 밑 기억의 샘물을 조용히 건져 올린 글들로. 12번의 만남 끝에 흩어져 있던 심연의 기억들을 한 줄로 엮어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라는 이름으로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다. 아직은 서로를 몰라 조심스러웠기에, 아니 짧은 시간이었기에 책이 그리 두껍진 않다. 때로는 황홀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때로는 끄집어내기도 창피한, 그래서 잊고 싶은. 때로는 가슴 아픈 헤어짐으로 아득한 그리움을 끌어안고 눈물짓기도 한 이야기들을 사심 없이 드러내었다.
어쩌면 우리들이 발간 한 책은 60 언저리에 있는 퇴직자들의 소회의 글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고개를 넘어가는 신중년의 작은 외침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의지의 발로이기도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30년 이상 젊음을 불사르고 뒤안길로 물러난 그들은 새로운 항해를 위해 부두에 서 있다. 저 멀리 반짝이는 등대를 향해 함께 힘을 모아 노를 저으려고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0.5도씨의 온도를 더하기도, 빼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시절인연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누르려다 광고판에 붙은 포스터를 보았다. 신중년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프로그램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사 오면서 다니던 평생교육원의 글쓰기를 멀다는 이유로 자주 빼먹었다. 함께 정든 문우들과 교수님의 자상하신 가르침으로 발을 뺄 순 없었지만, 거리적으로 멀다는 건 마음마저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잘 쓰지도 못하는 글이지만 당근과 채찍의 적당한 맞물림이 없는 탓인지 글쓰기가 어려웠다. 뭔가를 쓰려면 머리가 하얘졌다. 글쓰기의 느낌이라도 잊지 않으려 머리를 굴려본다. 이건 뭐지? 무슨 말을 하려고, 무엇을 어떻게 쓰려고 하는 것이지? 평소도 부족한 글이지만 그야말로 한 줄도 쓸 수 없는 녹슴이 보였다. 기름칠이 필요한 듯했다.
그럴 즈음 주변에 글쓰기와 관련된 배움의 장소를 찾다가 자서전 쓰기를 지도해 준다는 프로그램을 발견한 것이다. 한 달 반동안 일주일에 두 번 하는 신중년 교육프로그램으로 대상은 50~65세까지이다. 이 시기의 사람을 "신중년"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처음 들어본 새로운 계급형성이다. 중년도, 노년도 아닌 신중년! 그래, 나는 신중년이다. 대부분 교육에 오신 분들은 퇴직을 앞두거나 퇴직을 하신 지 얼마 안 된 분들이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 요직에 계셨던 분들이라 족적을 남기고 싶으신가 보다. 사실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이 대단해서 자서전을 쓰려고 이 교육을 수강신청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글쓰기의 맥을 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볼만한 인생을 산 사람은 위인전을 쓰는 것 같다. 난 그저 내 삶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단지 기록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기에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는 나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할 뿐이다. 공부를 하다 보니 다소 기회가 된다면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찾아 떠나 보는 여행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살아온 역사서가 될 것이고, 나다움을 발견해 가는 보고서가 될지도 모른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의미 있고 아름답기를 소망하며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인생 1부를 퇴직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내겐 그리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글쓰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쯤 정리하며 뒤를 돌아보는 것도 의미는 있었다. 이것은 자아성찰의 기회와 자기 성숙의 기회가 함께 공존하는 좋은 기회였다. 자서전을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나이 들면서 잘 살아가기 위함이 목표가 되었으니까.
이런 마음가짐에서 시작했던 글쓰기가 끝을 맺었다. 프로그램 연수기간이 끝나고 12명의 수강생은 서너 편씩 원고를 제출하여 우리들만의 책을 만들었다. 그동안의 배움으로 만들어낸 성과보고서인 동인지였다. 한 권의 책은 그 여느 책 보다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작지만 소중한 책을 끌어안으며 앞으로의 삶을 함께 글로써 공유하기로 하였다. "0.5도씨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간에 0.5도씨 사이에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로 세상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 결과는 먼 훗날 오롯한 자신만의 자서전으로 잉태될 것이다. 신중년센터에서 만난 분들의 제2의 인생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