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따라가는 추억여행

시작과 끝. 여기서 취하다!(양평여행 1일차)

by 바다나무

연식이 오래된 여행가방에 짐을 챙겨 넣었다. 얇은 홑이불 두장(깔고 덮고). 속옷 두벌. 실내복 두벌. 양말 두 개. 수건 두장. 소형 드라이기에 드라이 빗. 세면도구와 기초화장품. 이 정도면 될 듯싶다. 등산화와 스틱. 가벼운 아이젠과 모자. 장갑은 미리 트렁크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 가방만 넣어두면 최소한 어디서든 1박은 가능하다. 이제 언제, 어디로든 떠나도 된다.


맛집이나 유명한 장소는 기다리다 진이 빠지니 되도록 평일을 이용하면 다소 한적하고 숙소도 조금 저렴하다. 미리예약도 하지만 세상이 좋아져 출발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 전화하면 주말이나 피서철이 아닌 이상 괜찮은 숙소들이 많이 있다. 가끔 지난번 동해안여행 때처럼 숙소의 실제와 댓글이 달라 낭패를 본 적도 있지만 단 믿어 보기로 했다.


집 떠나는 여행이 매번 바다가(고양이) 걱정되어 발목을 잡았지만, 이제나 저제나 벗어나길 갈망하지만 아직은 동숙하고 있는 예쁜 공주가 집을 장악하고 있으니 그 또한 문제없고, 취미로 배우는 공부들은 개근상 안 받을 요량하고 한눈 질끈 감으면 될 터이고, 그저 두 다리 툭툭 두드려보아 땅과 맞닿을 때 삐그덕 소리 안 나5.5 ×8.5센티 플라스틱 네모난조각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만 챙기면 끝이다.


올해는 발 닿는 곳으로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살고 싶다. 때로는 바다로, 때로는 산으로 무작정 길 나섰다 멈추고 싶으면 그냥 눌러앉을 예정이다. 기회가 되면 구름 위도 날고 싶다. 내 삶만 드러내며 살 순 없지 않은가? 다른 사람은 무얼 하며 어떻게 사는지 눈구경, 입구경도 하며 마음 편히 호사 좀 누리며 살고 싶다. 비상용으로 가방을 챙겨놓고 나니 이 참에 한번 떠나자고 한다. 그래, 가방에 빠진 것 없나 테스트도 할 겸 추억여행 출발해 보자.


어디로 갈까 하다가 경기도 양평으로 떠나기로 했다. 가려고 했던 숙소에 방을 예약하고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출발했다. 두어 시간 걸려 점심은 국내산 팥만 이용한다는 문호리 단팥죽 맛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어렸을 때 동지마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실제는 형수) 팥죽을 먹고 자란 남편은 가끔 생각이 나나 보다. 우리는 단팥죽과 팥칼국수를 시켰다. 설탕과 소금이 구비되어 있어 죽에는 설탕을, 칼국수에는 소금을 넣어 각자의 취향대로 맛을 내어 먹었다. 이제 시간도 여유가 있으니 돌아오는 동지에는 한번 만들어 먹어 봐야겠다.


밖은 영하의 날씨로 추운데 차 안에는 유리창을 투과한 햇살에 따뜻했다. 점심을 먹고 주변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어 방향을 돌렸다. 우리는 정원이 있는 카페를 좋아한다. 예쁜 꽃과 나무가 있으면 구입해다가 세컨하우스가 있는 농장에 심는다. 그곳이 우리의 슈필라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곳은 경기도 민간정원 부분에서 대상을 받은 서종면에 있는 자연 속 힐링카페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어느 대저택의 정원처럼 관상용 나무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겨울이라 다소 나무들이 앙상하기는 하나 주변 풍광으로 보아 타계절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상상이 간다.


17년간 정성 들여 가꾼 주인장의 손길과 정성이 가득하다. 정원한쪽으로 흐르던 벽계천은 며칠째 추운 영하의 날씨로 인해 꽁꽁 얼어있다. 방문객을 위해 설치해 둔 눈썰매가 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시골 도랑가에서 양팔로 콕콕 찍어 타던 네모난 눈썰매다. 남편은 우리도 한번 타보자고 한다. 옛날 어릴 적 생각이 나는가 보다. 그래, 이제부터 하는 여행은 남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보지 못했던 거 다 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기로 했으니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


남편은 벌써 쏜살같이 썰매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실 난 어렸을 때 할머니댁에 가서 몇 번 타본 경험이 전부다. 앉기도 전에 썰매가 자꾸 미끄러져 도망간다. 자세부터 어설프다. 문득 골절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하지만 몇십 년 만에 해보는 추억소환인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안정감 있게 착석했다. 남편을 따라잡으려고 양팔을 힘껏 찍었다. 남편은 나를 약 올리듯 돌아보며 쏜살같이 도망간다. 다 늙은 초등학생 둘이 쫓고 쫓기며 얼음 위에서 술래잡기한다.


카페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빙판에서 올라오니 커다란 화목난로의 불기운이 따뜻하다. 요즘 난방비 폭탄에 전 국민이 아우성인데 야외에 피워놓은 이 난로의 화목비는 얼마나 들까? 괜한 오지랖에 걱정이 된다. 그럼에도 군데군데 설치해 놓은 난로가 추운 겨울 찾아온 방문객을 위한 주인장의 배려같아 반갑다. 손은 따뜻한데 목이 춥다. 들어올 때 받은 입장권으로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하니 실내로 들어가서 목구멍으로 뜨거운 물줄기를 흘려보내야겠다.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산책길에 나섰다. 잠시 쉬고 싶었지만 얼른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에 마음이 바빴다.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내가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발령받아 근무했던 초임지 학교가(유치원) 있었기 때문이다. 강산이 서너 번 바뀐 세월 속의 학교의 모습이 궁금했다. 학교는 그 옛날의 모습 중 본채만 남아있고 많은 부속건물들이 새로 들어선 채로 알록달록 도색이 되어 현대화 건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현관 앞에 세워진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던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이 하얀 옷을 깨끗이 갈아입은 채 지난날의 나와의 추억을 지켜내고 있었다.


학교 앞 냇가의 물이 꽁꽁 얼어있다. 아이들과 팽이치기하고 물고기 잡던 모습이 떠오른다. 팽이 칠 줄도, 물고기 잡을 줄도 모르는 새내기 선생님을 아이들은 이렇게 하는 거라며 시범을 보이고 가르쳐 주었다. 돌아보니 내가 가르친 것이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배운 것 같다. 문득 지금은 40이 훌쩍 넘어 장년의 모습으로 어디선가 제 역할을 다할 아이들이 궁금해진다. 어슴프레 얼굴들이 하나둘 떠올려진다. 인선이, 주연이, 재준이, 문구...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출퇴근을 하던 기차역이 보인다. 너무 시골이라 읍내에서 이곳으로 출퇴근을 하였다. 퇴근시간이 되면 5시 5분 청량리행 비둘기호 기차를 타기 위해 출퇴근하는 몇몇의 교사들은 매일같이 전속력을 향해 달렸다. 대부분 조금씩 연착이 되었지만 정시에 기차가 들어오는 날은 역에 계신 승무원아저씨는 저 멀리 뛰어오는 우리들 때문에 출발 수기를 흔들지 못하고 기다려 주셨다. 그때 그 지역에서 기차가 연착된 것은 아마 우리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련하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그 시작도, 끝도 이곳에서 즐거운 추억여행으로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역에서부터 다시 거꾸로 되짚어 학교를 지나 숙소로 향한다. 다시 시간을 재어봐도 5분 걸린다. 당시를 생각하다 보니 뛰던 모습에 괜스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아니 그리움이 차 오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해장국 집에 가서 따끈한 국물에 막걸리 한 모금으로 추억에 취해 보아야겠다. 그 옛날 직원회식 할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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