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고래마을!
얼마 전 주말에 나무를 사러 묘목농원을 갔다.
전국 최대규모의 나무시장이라 웬만한 나무는 다 구할 수 있었다. 이것저것 필요한 나무를 사서 시골 농막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전에 우리는 습관처럼 하는 일이 있어 남편은 핸들을 돌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낯선 도시를 가거나 드라이브를 하면 그곳의 맛집이나 카페를 찾아 투어를 하는 건 어느 사이 우리들의 일상이 되었다.오늘도 인근의 카페와 식당을 찾아 우리들만의 여유를 가져본다.
외딴 산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니 익살스러운 그림과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벽화가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밝혀주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가운데 저수지를 끼고 있는 아늑한 마을이 보이고 호떡을 판매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우리가 찾아가는 카페 겸 갤러리에는 흙으로 빚은 토우들이 잔디밭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고, 예쁜 조형물들이 많은 걸 보니 누군가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까페를 운영할것이라는 생각을 느끼게 했다.
저수지를 둘러싼 마을이 너무 아늑했다.
곧 해가 저물 것 같아 이름다운 경치부터 감상하기로 하였다. 둘레길을 걸을 땐 잘 모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저수지가 고래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고래마을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산속에 둘러싸인 저수지의 물빛이 고요함으로 나를 평온의 늪으로 안내하였다. 좀 더 이른 계절에 왔더라면 예쁜 꽃들도 보고 자전거 라이딩도 하였을 텐데 아쉬웠다. 왠지 다음기회를 만들어 다시 와야 할 것 같다.
데크길을 따라가다 보면 고래쉼터라 하여 공연행사나 피크닉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넓은 전망테크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는 피아노가 한대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뚜껑을 열고 괜스레 건반을 눌러보았다.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전시용은 아닌 듯했다.
문득 설렘과 가슴 졸임으로 보았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떠올랐다. 스위스의 이제발트 호수의 데크에서 현빈이 피아노를 치던 멋진 모습이 되살아나 중년의(?) 가슴이 설레었다. 내년에는 남편의 손잡고 달려가리라. 스위스 융프라우로...
다소 허기가 느껴져 호떡을 사서 카페에서 커피와 먹기로 하였다. 아까 지나가면서 얼핏 보았던 카페 여사장님이 호떡을 팔고 계셨다. 주문을 하고 호떡이 구워지는 동안 '고래마을장터'라고 쓰인 건물의 문이 열려 있기에 혹시 로컬푸드를 파는 곳인가 싶어 살펴보았다. 테이블 위에 있는 밥솥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양념간장이 커다란 유리통에 담겨 놓여 있었다. 특별히 음식이나 물건은 팔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기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할머니)이 나타나 "색시, 배고파요? 배고프면 내가 밥 줄까?" 하며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엉겁결에 "예? 아~아뇨, 여기 혹시 음식 파는 식당인가 해서요?"라고 멋쩍게 말하며 호떡이 구워 졌을 것 같아 얼른 자리를 옮겼다.
다 구운 호떡을 종이컵에 담아 주시던 여사장님은 어르신과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왜 그냥 오셨어요? 배고프다고 그러면 밥주실텐데.." 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금이라도 가서 밥을 달라 그러라고 채근하신다. 난 거지도 아니고 이곳에서 차 마시고 가다가 읍내 맛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 했다. 어스름 해가 넘어갈 무렵 낯선 동네에 와서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가려는데 아까의 그 어르신이 들어오라고 손짓하신다. 맛있는 무밥을 했으니 들어와 저녁을 먹고 가라 하신다. 호떡을 팔던 여사장님도 오늘 마을주민 몇 분이 호떡장사를 마감하고 무밥을 해 먹기로 하셨다고 하면서 배고프면 먹고 가라고 부추기신다.
알고 보니 어르신은 면장님(구) 사모님이시고 호떡을 파시는 분은 고래마을에 남편 따라 귀촌한 젊은 여자 이장님이셨다. 이곳은 마을 활성화를 위해 동네분들이 합심하여 마을공동체를 꾸려 예쁘게 마을을 조성해 나가는 곳이었다.
우리는 오늘 이 동네를 찾은 마지막 손님이고 마침 저녁때가 되어 지나가는 길손이지만 따순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내고자 하는 마을의 인심이었다.그냥 가려했더니 "가을무밥은 시원하고 달아요"라는 어르신의 유혹에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무밥을 얻어먹었다. 잊지 못할 맛이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상황들, 그 속에서 가슴 저 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원지모를 따스함에 목이 메었다. 이러한 정을 느껴본지가 언제인가?
무밥은 어릴 적 고향에서 가족들과 양념장에 비벼 먹었던 아스라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추억소환과 함께 그리움이 있는 음식을 소박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며 먹은 무밥은 내게는 살아가는 동안 남편과의 오랜 추억담이 될 것이다.
식사도중 우리 내외가 한때 이 지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하니 더더욱 반가워하신다.
"어쩐지 두 젊은 양반들이 점잖아 보여 왠지 꼭 밥을 먹여 보내주고 싶었다"라는 어르신의 말씀을 우리 내외는 감사히 받으며 낯선 듯 낯설지 않은 그곳을 빠져 나왔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순수함을 순수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워졌다. 아파트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일상에서 오늘 이 어르신이 보여준 따스한 정을 난 오래도록 그리워 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백미러로 거울을 보았다. 내 얼굴이 허기져 보이는지...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과 그리움이 내 마음에서 아련한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웃
따사한 정
한 움큼 손에 쥐고서
이웃이라 하면서
나를 부르더이다.
부침개에
보리밥에
김치 한보시기
내 몫이라 하면서 챙겨주더이다.
준 것 없이 받기만 하기에
송구한 마음 들어
잠시 사양하나
언제나 손은 넙죽이더이다.
겉만 바쁘고
속은 늘 비어있는 내게
이렇듯 보살핌에
염치없어 고개 숙이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