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탓이다.
당초 오늘은 손주에게 가기로 마음먹은 날이다.
지난 주말 손주가 좋아하는 딸기를 경상도 함양에 갔다가 밭에 들러 직접 사가지고 와서 가져다 줄 겸, 반찬가게에서 몇 가지 반찬을 사 왔다는 딸의 말이 신경 쓰여 반찬을 만들어 가져다주려고 이것저것 보따리를 싸놓았다.
뒤늦게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도 기상청 일기예보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기대감으로 보따리 하나는 현관 앞에 두고 출근하는 길에 남편에게 차에 실어 놓고 가라는 당부를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하얗다.
남편은 현관 앞 짐보따리를 풀어 냉장고며 베란다에 물건들의 자리를 찾아주고 출근을 했나 보다.
늦게까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든 아내에 대한 배려인지 조용히 방문이 닫혀 있다.
가족 카톡방에는 큰딸이 눈이 많이 왔으니 절대 오지 말라는 당부의 문자가 내 확인을 요하는 채로 눈 내리는 배경과 함께 쌓여 있다.
잠시 후 출근한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금요일 오후 오전만 근무하고 조퇴하고 같이 가자는 내용이었다. 이제 손주에게 가는 건 포기하고 금요일 오후를 기다리는 수밖에...
침대와 한 몸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 하지 않았던가? 그래, 오늘은 마구잡이(?)로 쉬어보자. 막상 퇴직을 했음에도 집에서 편히 쉬어 본 기억이 없다.
어쩌면 매일 쉬었는데도 쉬지 못한 것 같은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공감한다.
사실은 내가 만든 루틴으로 나의 하루를 옥죄였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반복될까 봐 하루 한 가지 만이라도 포인트를 잡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대단한 이벤트도 아니면서...
100세 시대의 삶과 관련하여 책을 읽다가 멈칫 놀랐다.
‘슈퍼시니어 증후군’을 경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은퇴생활은 인생에서 나의 모습을 찾으면서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에 ‘잠시라도 한가해서는 안된다’라는 강박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은퇴 후에도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한 채 피로감을 느낄 만큼 타이트한 생활을 할 가능성이 높아 건강에 무리가 갈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 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은퇴 후에도 “잠시 멈춤!”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얼마 전 손끝과 발끝이 저리고 악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 병원에 갔다.
발만 저린다면야 허리디스크가 있는 터라 그로 인한 증상이려니 하겠지만 손까지 저리니 혹여 뇌 쪽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뇌이상으로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로 인해 마음 한쪽에서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집 앞의 제법 큰 신경외과 병원을 찾아 증상을 말하고 검사를 했다. 진료를 받으러 온 김에 가끔씩 잊은 물건 때문에 집에 다시 돌아가는 불편함으로 인한 증상까지 이야기 하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도 가스를 잠갔는지, 바다(고양이)를 방에 두고 문을 닫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걸 꾹 참고 병원에 갔다. 검사는 근전도와 신경인지기능 검사였다.
근전도 검사는 “근전도 기기를 이용해 근육의 전기적 활성도를 확인하는 검사”로 주로 말초신경과 근육에 이상을 느끼는 환자들에게 전기자극을 주어 이상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신경인지 기능검사는 문답식으로 인지기능을 평가하여 노화과정에 의한 것인지, 치매 또는 경도 인지장애 인지를 확인하는 검사이다.
다행히 두 검사 모두 아무 이상이 없고 단지 의사는 혹시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는 물음을 내게 남겼다.
좀 더 느림의 미학을 몸에 체득시켜야겠다.
퇴직을 하고 많은 것을 비우고 내려놓았다고는 하나 그건 말뿐인가 보다. 몸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것 같다.
분명히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듯 시행착오를 겪는 것을 보면 아직 성숙하지 못한 탓이리라.
하긴 시간이 지날수록 왜 이렇게 모르는 건 많고 배워야 할, 아니 알아야 할 것들은 많은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침대와 한 몸 하며 널브러져 있으련다.
날씨가 가져다준 잿빛선물을 안고 바다(고양이 이름)와 함께 따스한 집안의 온기를 흡입하리라.
이 순간을 느끼고 싶다. 지금이 좋다
완벽
상. 하. 좌. 우. 여백
정확히 맞추어 놓고
상대방에 대한 답
이미 만들어 놓고
또 다른 가설도
또 다른 대안도
이미 설정해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허(虛)는 있었고
구멍은
뚫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그 구멍에
바람이 새어 들어옵니다.
완벽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