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하다. 자질구레한 짐만 정리했어도 집안이 난장판이다. 기분이 이상하다. 그건 날씨 탓이다. 희끄무레한 날이 햇살을 밀치고 있다. 살짝 비를 흩뿌리고는 있으나 문제 될 만한 날씨는 아니다. 설치고 왔다 갔다 했지만 쌀쌀한기운이 있어 얇은 긴팔 옷을 덧입었다. 이런 날은 따뜻한 방바닥에 앉아 꽃피는 정원을 구경하며 따스한 차 한잔 마시는 게 제격인데. 그래, 못할 것도 없지. 퇴직 후 안 해 본거, 못해 본거 하기로 했는데 해보지 뭐. 그럼? 이사 가야지, 그런 집으로.
이사를 간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세였다. 바다나무 주택을 처분하면서 분양받은 집으로 들어가기에는 계약기간이 남았었다. 또한 남편과 나도 아직 직장 생활 중이라 출퇴근 거리가 멀어 다니기는 무리라 세를 주고 우리도 전세살이를 했다. 이제 기간도 만료가 되었고 우리도 둘 다 퇴직을 하였으니 이사를 가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사 가는 집은 1층이다. 늘 고층에만 살았었다. 혹자는 나이 들면 지기( 地氣)도 받고 동선도 짧아 1층이 좋다고도 하지만, 혹자는 사생활 침해와 조망권으로 고층이 좋다고도 한다. 다 제 각각의 취향이므로 좋고 나쁨 또한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집을 선택해 이사를 가는 데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하나는 작은 텃밭이 딸려있어 정원을 감상할 수 있고, 하나는 준이가 맘껏 뛰어놀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보고 1층이라 불편하면 다시 이사 간다는 무언의 약속도 내재되어 있다. 우리 집이라고 미련을 갖고 불편함을 감내하며 그냥 살고 싶지는 않았다. 사는 동안 이 주변을 즐기며 일 년 살이 하는 기분으로 살아보려고 한다. 어쩌다 준이가 오면 많이 활동할 나이니(3살) 층간소음 없이 편하게 뛰어놀게 할 예정이다. 작지만 예쁜 꽃밭에서 물놀이도 하게 하고 모래놀이도 하게 할 예정이다. 그러기엔 지금이 적기다. 이러한 생각으로 벌써부터 나만 설레고 있다.
그동안 입주청소며 부분 리모델링 등 이것저것 손볼곳이 있어 몇 번 다녀갔다. 정원에 미리 꽃과 나무도 심어 놓았다. 이제 짐만 옮겨오면 된다. 무엇보다 이삿짐 중 가장 큰 짐은 바다(고양이)이다. 낯선 환경에 예민한 터라 신경을 많이 써야 할 동물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사에도 나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밥도 먹지 않고 한쪽에 한동안 웅크리고 앉아 경계의 빛을 보였다. 스스로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바다용품을 미리 가져다 놓고 작은딸과 먼저 조심스럽게 이동을 했다.
그러고 보니 살아오는 동안 이사를 꽤 많이 한 것 같다. 직장이동 문제로, 아이들 학교문제로 등등. 다소 번거롭고 힘은 들었지만 새로운 분위기로 삶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도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이번에는 많은 짐을 정리하고 간다. 옷가지며 필요 없는 세간들을. 직장도 퇴직했고 나이 들수록 가볍게 살고 싶어졌다. 미니멀 라이프로 새로운 곳에서는 간단하게 시작하려 한다.
이번에는 화장실이 딸려있는 안방을 딸에게 내어 주기로 했다. 프리랜서로 방송일을 하는 딸은 밤늦게 까지 일을 하다 보니 화장실로 인한 인기척과, 다양한 방송장비, 많은 물건들이(화장품, 옷) 큰방을 더 필요로 할 듯 싶었다. 다 자란 딸과 아빠가 화장실을 공유하는 것도 다소 불편해 보이고. 가족구성원의 특성에 맞게 융통성 있는 방배치도 의미 있을 듯 싶었다.
오전에 비가 올 듯 말 듯하던 날씨가 새로운 집에 도착할 즈음엔 화창해졌다. 떠나온 아쉬움보다는 새로운 집에서의 희망감으로 들떠 있었다. 이삿짐센터 분들이 짐을 정해진 장소에 내려놓고 대충 정리해 놓고 가셨다. 아무래도 정리는 생활하는 우리가 차근히 해야 될 듯싶었다. 짐을 정리하다 보니 커다랗고 썰렁했던 집이 그리 넓어 보이지 않았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친숙한 물건들 속에서.
한꺼번에 물건을 정리하는 게 무리일 듯싶어 잠시 차 한잔을 마시며 쉬어가기로 했다. 조금 후에는 전자제품 설치 기사님들이 오실 예정이니 막간의 틈을 이용해 커피를 마시며 쉬고 싶었다. 다소 좁지만 야외카페 분위기를 즐기면서 마시기 위해 정원으로 나갔다. 1층이지만 차량 통행이 안되고 산책길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그다지 사생활에 침해는 받지 않을 것 같다. 다소 부족한 대로 만족해하며 살아 보련다. 일년 동안만.
다음날 오전되니 집안정리가 대충 끝났다. 우리 내외를 보고 형제들은 금손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둘 다 빠르고 정확하다. 미리 집이 비어있던 터라 커튼이며, 잔잔한 짐들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정리한 탓도 있다. 날씨가 화창해서 새로운 동네 탐색전에 나갔다. 도심자체가 계획도시라 이웃아파트와의 경계가 정원으로 꾸며져 있어 아름다웠다. 펜스테몬. 홍가시, 수수꽃다리, 휴케라, 큰 꿩의비름... 등 집에서도 농장에서도 많이 본 꽃들이다.
이사 온 곳은 전에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출장으로 자주 와 본 곳이라 그런지 낯설지가 않다. 무엇보다 보행자 도로와 자전거 도로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안전함에 현관 앞에 세워둔 자전거가 종종 나들이 할 것도 같다. 그동안은 자전거 전용도로가 멀어 자전거를 차에 싣고 오가는 것이 번거로워 방치해 두었었다.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미로의 탐색전에 도전해 보리라.
아파트 단지를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오른쪽은 신도시이고, 왼쪽은 구도시이다. 극명하게 다른 이분화된 도시,
그 가운데서 나는 일년 동안 살아 가야 한다. 어쩌면 과거와 현재사이에서 또 다른 미래를 꿈 꿀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일 년 살이를 통해 초로의 인생 2막을 다시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