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에 걸려 있는 옷을 쳐다보았다. 즐비하게 걸려있는 수많은 옷. 엄청 처리하고 나눔 했음에도 많이 남아있다. 허긴 근 40년 가까운 세월을 직장 생활했으니 보통의 여자들이라도 한쪽 벽면은 차 있을 것이다. 거기에 가능한 똑같은 옷은 계속해서 안 입는다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나를 지켰냈으니 그 양 또한 어마하리라.
퇴직을 하고 오전시간을 어영부영 그냥 보내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 나태가 어느 날 나를 주저 물러 앉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그래서 일어나면 무조건 세수를 하고 화장을 했다.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부르면 당장 달려가기라도 할 듯이. 그러나 무언가를 기대하고 준비를 하는 건 아니다. 그냥 하루를 아무 느낌 없이 어제와 똑같이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약되어 있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무슨 카페를 예약씩이나 하고 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 돈 주고 내가 차를 마시러 가는데도 전화를 하고 승인을 받아야 가는 곳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먹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다. 그저 본인들이 사는 집을 예쁘게 정원으로 꾸며놓고 오는 손님과 같이 차를 마시며 꽃과 나무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그냥 지나가다 들르는 카페가 아니기에 다소 초대받은 느낌도 들었다. 적당한 예의를 갖추어야겠기에, 아니 예쁜 꽃밭에서 폼나는 사진 몇 장이라도 찍을 생각에 괜찮은 옷을 골라 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퇴직 후 저만치 외면당했던 옷들이다. 웬만큼 치장해서는 꽃을 이길 수 없으니 무채색옷으로 골라 입었다. 오늘의 나의 소중한 외출에 진심을 다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의 일상에 소중한 의미를 담았던것 같다. 마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비포장도로를 지나 산길로 접어든다. 옛날 마지막 근무처가 있던 곳이라 익숙하면서도 산길로 들어서니 낯설다. 시골동네 속에 넓은 정원이 나오고 심플하면서도 예쁜 집이 한채 보인다. 1시에 예약을 하고 갔던 터라 정원을 들어서니 주인내외가 반겨 주었다. 200여 종의 꽃과 나무가 아담한 펜션과 어우러져 예쁘게 가꾸어져 있었다. 6월에는 보랏빛 라벤더가. 10월에는 빨간색 핑크뮬리가 정원을 채운다고 한다. 오늘은 장미와 사초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부부가 정성을 들여 가꾼 정원이다.
특별히 전공을 하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좋아서 꾸미다 보니 본인들만 보기 아까워 농장을 오픈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들이 가꾼 꽃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다시 행복을 느껴 예약손님에게만 정원을 개방하는 것이다. 물론 오다가다 정원이 예뻐 들른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럴때면 그틀은 풀을 뽑고 정원을 가꾼다고 하였다. 그들도 손님맞을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이었다. 정원에 진심이고 손님에 대해 나름 예의를 갖춘 주인내외와 한참을 꽃에 대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사진도 찍고 허브차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틀에 박힌 교직사회에서 벗어나 보니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취미를 마주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또다른 인관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한우물만 팠던 것이 정답도 아니었고, 인생의 전부도 아니라는 생각에 다소 내가 우물안 개구리 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꽃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작은 것에 행복해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작은 자연도 나누고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자신의 삶을 여유있게 가꾸어 간다. 남은 인생은 나도 꽃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사심 없이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늦은 식사를 하고 나섰던 길이라 돌아오다 보니 출출해졌다. 식사 때를 놓친 탓이라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모든 식당이 영업을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요즘 사회의 새로운 변화였다. 시골의 조그만 식당도 3시부터 5시까지는 거의 영업을 하지 않는다. 모두들 저녁준비라는 명분으로 휴식시간의 여유를 갖고 싶은 탓이리라. 법적인 휴게시간을 지키며 의무사항을 이행하는 탓도 있으리라.
우리는 주변의 롯데리아를 들어갔다. 얼마만인가. 한 십여 년 만에 들어와 본 것 같다. 인스턴트 음식이 몸에 안 좋다는 편견과 어쩌면 젊은 사람들의 전유공간이라는 편협한 생각에서인지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다. 연애시절이나 아이들이 어릴때 가끔 와보고 둘이 일부러는 와본 기억이 없다. 오랫만에 맛본 탓이라 그런지 맛있었다. 별것 아닌 햄버거가 둘만의 오롯한 시간에 추억을 더해주었다. 간단한 한 끼 식사로 여유와 행복을 맛본다.
다른 사람들은 퇴직 후의 일상을 어떻게 보내는지 모르겠다. 나름 자신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채색해 가리라. 아직은 1일 1 맛집, 1 카페라는 마음으로 바깥세상을 배회해 본다. 묶였던 세상에서 벗어나 날갯짓 해본다. 어쩌면 우리도 먼 훗날 예쁘게 꾸며놓은 바다나무 정원과 농장을 꽃을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개방해 차 한잔을 대접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어본다. 오늘도 주어진 일상의 작은 휴식에 감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