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실버타운

by 바다나무

문득 식사 때가 되었는데 밥이 하기 싫어졌다. 주부의 영원한 숙제, 의무이행사항을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걸 해 먹는 것도 아닌데 식사 때가 되면 늘 오늘은 뭘 먹지? 하고 고민하게 된다. 차라리 가족 중 누군가가 오늘은 무엇을 해 먹자?라고 하여 뉴가 정해지면 간단한데 대부분은 그냥 아무거나. 아니면 대충 먹자 라는 식이 되어 버리면 주부는 냉장고 문을 몇 번씩 열었다 닫았다 하 고민하게 된다.


말은 아무거나, 대충이지만 상차림은 그럴 수가 없다. 물론 요리실력이 단해 주어진 재료에 따라 뚝딱 만들어내는 우렁각시 같은 재주가 있다면 몰라도 주부라면 매번 부담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럴 때면 대부분 손에 익은 쉬운 요리로 빠른 속도감을 내어 식사라는 이름 짓기를 마무리하거나, 그도 저도 엄두가 나지 않고 귀찮은 생각이 들면 배달의 민족을 등장시킨다. 색 맞추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 구원의 우렁각시다.


직장을 다닐 때 일 년에 최소한 한 번은 겨울방학 때 선진지 견학 겸 퇴직하시는 분들 위로여행을 갔다. 지역별 교장단에서 실시하는 연수라 대부분 안면이 있고 평상시 회의나 출장에서도 자주 만나는 분들이라 임의롭다. 평소 자상하시고 여교장들을 잘 배려해 주시던 A교장 선생님께서 2월 퇴직을 앞두고 요리를 배우신다고 하셨다. 그동안 내조한 아내에게 앞으로의 식사당번은 당신이 하시겠다고 자처하셨다고. 이에 다소 권위적이고 무게감 있으시던 B교장선생님이 "난 죽으면 죽었지 요리는 못해!"라고 말씀하심과 동시에 모든 분들로 하여금 공분을 샀다.히 여교장선생님들 부터.


가만히 들어보니 퇴직을 앞두고 많은 교장선생님들이 전기밥솥, 세탁기, 청소기등 전자제품 다루는 걸 익히고 계셨다. 앞으로의 삶은 어느 한쪽의 희생이나 도움을 받아서는 안되고 둘이 함께 해나가야 한다는 건전한, 아니 당연한 생각들을 가지고 계셨다. 이 또한 변해져 가고, 당연히 변해야 하는 노년의 시대상이다. 나 역시 많은 가사를 담당해 주는 남편 덕분에 삶이 수월하다. 여기서 잠깐! 남자분들이 "도와준다"는 용어는 쓰지 않겠다. 이 또한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공분을 살 언어이기에 그 민감함을 외면하 안 될 것 같서.


퇴직을 하고 강원도 여행길에 우리는 실버타운에 들렀다. 가장 큰 이유는 퇴직하고 밥을 덜하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실버타운이 생각났다. 그것은 어느 프로그램에서 퇴직하신 부부교사가 실버타운에 들어오려면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입소해서 해주는 밥 먹으며 그곳 부대시설에서 취미생활. 문화생활을 즐기라고 하였다. 그것이 노년에 건강을 지켜가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퇴직을 앞둔 우리도 그분의 긍정적인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생각에는 실버타운은 기력 떨어져 밥 해 먹을 능력이 안될 때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분들은 힘없고 아프면 노인요양원 가야지 왜 이곳에 와서 혜택도 못 받고 비싼 돈만 내느냐고 반문하셨다.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우리는 전국의 몇 군데 실버타운을 조사했다. 실버타운의 입주조건은 부부 중 한 사람이 만 60세 이상이어야 한다. 혼자인 사람은 물론 본인이 만 60세 이상이면 가능하다. 그리고 독립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야 하며, 100% 생활비를 본인이 부담해야 하므로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노인복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실버타운들은 입지조건에 따라 가격차이가 천차만별이다.


우선 동해안 여행이 계획되어 있던 터라 바다가 가까이 있 공기가 좋아 살기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서 주변에 있는 곳을 들러보자고 하였다. 가보니 종교재단에서 운영하는 실버타운으로 대중온천이 딸려 있어 외부관광객도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깊은 산속에 커다란 건물이 산으로 둘러싸여 다소 웅장한 느낌이 든다. 사무실에 방문했더니 간단한 안내와 함께 평수별로 서너 군데 방호수를 알려주며 자유롭게 살펴보라고 하였다.


실내로 들어가 보니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라 다소 차가운 느낌이 들었지만 깔끔하다. 일반 아파트와 다를 바 없는 구조로 아래층에는 가족들이 와서 잠시 머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우리가 간 시간이 점심 시간이 지난시간이라 휴식을 취하시는건지 건물내부가 조용했다 . 언뜻 노인시설에는 시에스타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부대시설로는 바둑실, 컴퓨터실. 서예실, 휴게실. 물리치료실, 탁구장, 소극장 외 여러군데 방들이 취미생활이나 문화생활을 가능하게 하도록 시설이 잘 꾸며져 있다.


지나가다 보니 휴게실에 어르신 한분이 소파에 앉아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티브이를 보고 계셨다. 소파 등받이 위로 백발의 머리가 보이니 할머니인 듯싶었다. 복도까지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아마도 청력이 좋지 않으신 듯했다. 다른 방 컴퓨터실에는 할아버지 한분이 바둑게임을 하고 계셨다. 유리창 너머로 흑과 백이 아련히 겹쳐보는 모니터가 보인다. 몇 분이 이곳에 계시는지는 몰라도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실외에는 넓은 골프장과 산책로, 커다란 수영장이 산 하 나를 등에 업고 넓게 펼쳐져 있다. 자연경관은 더할 나위 없이 수려한데 마음이 이상하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없어 한적한 탓일까? 아니면 운영하는 주체가 선입견을 가진 종교재단이기 때문일까? 한 바퀴 돌고 차에 올라 산골짜기 굽이를 돌면서 내려오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혼자 티브이를 보시던 할머니, 바둑게임을 하시던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꾸만 떠올랐다. 아무리 자연경관이 좋고 돈이 있어도 나는 이곳에서 못 살 것 같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손으로 밥을 해서 먹는 게 맘이 편할 것 았다. 직은 건강한 식사와 가사 노동으로 부터의 해방은 쩌면 로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편안한 삶의 마무리를 위해 웰-다잉(well-dying)에 관심이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잘 늙어가며 살고자 하는 웰-에이징(well-aging) 되어야 할 것이다. 제2의 인생을 명품인생으로 만들어 한번쯤 호텔식 하이엔드( high end)실버타운에서 즐기는 삶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앞으로는 부모, 부부, 자녀 3대가 함께 생활하는 세대 공존형 주거단지인 실버주택이 나온다고 하니 나도 그때 가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대문사진 출처ㅡPixabay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