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에서 내부순환도로로 진입하기 직전이다. 앞에서 주행하던 승용차가 갑자기 멈췄다. 신호등이 바뀌기 전에 통과하려다가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뒤따라가던 나도 놀라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쿵!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플라스틱 물주전자가 좌석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벌려진 뚜껑 사이로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 집 정수기가 고장이 나서 퇴근길에 사무실에서 당장 먹을 물을 받아가는 중이었다. 정차 중에 팔을 뒤로 길게 뻗어 엎어진 물통을 똑바로 세웠다. 벌써 물이 반쯤 쏟아져 뒷좌석 바닥이 홍건이 젖었다. 쏟아진 물도 아깝고 바닥도 축축해지니 짜증이 난다.
동부간선도로를 주행하면서 물이 또 쏟아지지 않도록 앞차와의 거리를 충분히 두었다. 몇 번인가 속도를 급하게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 왔지만, 넉넉한 차간거리가 있기에 여유 있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떼었다 하면서 간격을 유지했다. 앞차가 급정차하더라도 달리는 관성을 천천히 흡수할 수 있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네처럼 정차할 때 기분 좋은 롤링이 느껴진다. 충격이 없이 자연스러운 흐름이 몸으로 전해진다. 뒷좌석의 물통은 물론 안전하게 가방에 기대어 있다
.
멀리 바라보며 상황에 따라 조금 앞서서 속도를 줄이니까 마음이 급하지 않다. 물이 쏟아지지 않으니 짜증낼 일도 없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이와 같지 않을까?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충격을 피할 수 있는데도, 급하게 코앞만 쫓아가다가 갑자기 막히면 충격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사실 서두른다고 일이 빨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급하게 하다 보면 타성에 의존하여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그런데 뒷좌석의 물 주전자는 내게 물이 쏟아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속도 조절을 하도록 완충 경보기 역할을 해주었다.
이제 내 마음 속에도 ‘물 주전자’를 넣고 다녀야겠다. 생각이 경솔하게 쏟아지지 않도록 천천히 느낌을 따라가야겠다. 대화 중에도 다른 사람의 말을 끊고 내 말을 먼저 하고 싶은 욕구가 쏟아지지 않도록 천천히 이야기해야겠다. 퇴근길에 급정거하면서 몸의 갈증을 적실 물은 쏟아졌지만, 그 물은 마음을 적시는데 쓰였나 보다. 덕분에 안전 운행을 다짐하고 마음을 차분히 바라보는 통찰의 시간을 더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 마음 속의 물 주전자는 삶의 충격이 한 번에 쏟아지지 않도록 완충 속도를 알려주는 경보기로 사용할 것이다.
차에서 내리면서 반도 안 찬 물 주전자를 바라보니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