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양말

by 낭만천사 유광영

그 양말은 발에 신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신은 거였다.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죠~~^^ 문자를 보고 바로 답변도 못 하는 결례를 했네요. 여러모로 고마운 점이 많고 저한테 잘 해주셨는데 잊지 않고 있어요. 놀러 갔을 때 물에 빠진 저에게 양말과 수건을 내어주신 ~~ 그 양말과 수건 깨끗이 세탁해 다음 만나면 드리려고 ~~ 새 양말과 새 타올도 답례로 드리려고 고이 모셔 놨네요. 이번 6월 동문 트레킹 때 봐요. 나온다고 밴드에 글 올려 주세요. 그때 봤으면 해요^^ ”


어느 날 대학원 석사과정 동문 선배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팬데믹으로 인한 사적 모임 제한이 해제되어 동문회에서 6월에 단체로 야유회를 가니까 그 때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보내온 메시지다.

코로나가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 2년 3개월 전 겨울에, 동문회에서 동해 바다로 야유회를 갔다. 하늘이 파랗고 햇살이 눈 부시게 부서진 날,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트레킹 길을 꽤 오랫동안 걸었다. 화창한 날씨, 맑은 공기는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바닷가에 늘어선 소나무와 바위를 배경으로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 앞에서 갖가지 포즈를 취하며 삼삼오오 사진을 찍었다. 겨울 바다의 파도가 넘실넘실 흰 포말을 뱉으며 백사장을 넘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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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히기 좋아하는 그 선배의 부탁으로 곁에서 꽤 많은 사진을 찍어 주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천진한 모습을 흉내 낸 포즈를 취하게 하여 여러 번 셔터를 눌렀다. 그녀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꽤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허리를 비틀고 손으로 턱을 받치는 자세를 취하다가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순식간에 바닷물은 그녀의 발목을 적셨다. 2월의 바닷바람은 꽤 쌀쌀하다. 물에 젖은 발이 추위에 많이 시렸을 것이다.


다행히 곧 점심시간이 되어 일행은 근처의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식사 전에 배낭을 뒤져보니 내게 여벌로 가져온 등산 양말과 수건이 있었다.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고 양말을 갈아 신으라고 그 선배에게 슬며시 전해 주었다. 매우 고마워하며 나를 바라보던 그 선배의 눈빛이 왠지 소녀 같았다. 평소와는 달리 나이에 비해 꽤 순수한 면이 엿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푸른 바다, 흰 구름과 갈매기가 삼각구도로 보이는 통유리창이 커다란 인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탁 트인 풍경, 따뜻한 실내,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는 수다 떨기에 좋은 장소였다. 오후의 태양이 기울도록 머물었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 다니며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인간은 다른 이와 연결됨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한 존재인가 보다. 눈인사 몇 마디 안부만 나누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니 말이다.


양말을 갈아 신은 그 선배가 평소에 좀 까칠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오늘 옆자리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큰 체격에 비해 웃는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지고 순수하게 보였다. 자신은 노래하며 춤추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느 제약회사 제품의 CF 모델로 나온 적도 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약간 연예인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을 나는 까칠하다고 했으니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경솔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2년 3개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코로나 감염병 시국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몇 차례 무대에 오르며 은퇴 생활을 즐겼다. 간간이 근교의 강가를 따라 산책하고 사색하는 여유도 부렸다. 그러다가 지난해 말 어느 고마운 분의 도움으로 올 초부터는 새롭게 직장에 다니게 되어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코로나로 인해 동문 모임도 하지 않으니 관심도 시들해져 스마트폰 밴드 앱도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다. 양말과 수건을 전해준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며칠 전에 갑자기 위와 같은 메시지를 받아보고 영화필름을 거꾸로 돌린 듯 머릿속은 2년 3개월 전 정동진 바닷가로 돌아갔다. 아, 그랬었지! 그리고 그날 저녁 고맙다고 그 선배는 저녁을 샀었는데···· 그 날 저녁 식사를 대접받았을 때 나는 이미 그 양말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쓰고 버려도 아깝지 않은 헌 양말인데····.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하찮은 양말 한 켤레로 인해 지금 나는 대단히 흐뭇하고 가슴이 뛴다. 이렇게 잊지 않고 새 양말과 함께 돌려주다니····.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로 오랫동안 기억된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그 순간 나는 마법과 같이 새로운 힘을 느꼈다.


오늘 나는 삶의 힘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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