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을 연상하며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에덴동산은 천국이라기보다 지옥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곳에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여 더 이상 나아질 것도, 좋아질 것도 없으니 무슨 기대와 희망이 있으랴. 또한 생명의 잉태도 없다. 아담과 하와가 같이 살아도 둘이 짝짓기 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얘기가 없다. 변화와 성장이 없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에덴동산은 태어나고 자람이 없는 죽음과 같은 고정된 세상이다. 처음과 끝이 같다. 그러니 그곳이 낙원이라는 주장은 모순이다. 희망과 생명이 없는 곳은 지옥과 같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을 탈출한 것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 둘이 관계하여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갈 생명이 탄생하였다. 생명이 있으니 성장하는 기쁨이 있다. 좌절하는 고통과 생명이 끝나는 죽음도 있다. 이렇게 이 세상은 태곳적부터 이어온 생명의 떨림이 조화롭게 숨쉬는 곳이다. 에덴동산이 얼어붙은 정적(靜的) 세상이라면 이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활력의 동적(動的) 세상이다. 생명과 희망이 있기에 에덴동산보다는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터전으로서 가치가 있다.
아담과 이브는 이 세상에서 땀 흘리며 땅을 일구어 생명을 유지했다. 더 많이 일구면 더 많이 수확한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다. 희망이 있는 곳은 지옥이 아니다. 아우슈비츠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이 살아남는 비율이 높았다. 환경은 같지만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회를 볼 수 있는 창이 크기 때문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보지 못했던 눈을 이 땅에서 갖게 되었다.
생명 현상은 우주에 대한 반역이다. 생명은 우주에 대한 반역으로 스스로 우주를 만들어가는 창조 현상이다. 중력을 거스르고 삼투압을 거슬러야 살아남는다. 동물은 중력을 거슬러 움직이고 식물은 삼투압을 거슬러 성장한다. 생명이 다하는 날에 중력에 의해 다시 땅으로 쓰러지고 삼투압에 의해 희석되어 우주로 돌아간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우주의 현상을 거스른다. 아담이 에덴의 질서를 거부한 것처럼 생명은 우주의 현상을 거슬러야 존재한다.
인생이 고해(苦海)라는 것은 우주에 대한 반역으로 끝없는 불안정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정과 균형은 한순간, 곧바로 새로운 변화의 몸부림이 이어진다. 평화로운 에덴을 떠나 아담은 끊임없이 이 세상의 위협과 마주해야 했다. 적응과 변화의 몸부림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따르고 누적된 몸부림은 우리의 영혼 속에 쌓여왔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울림이 있다.
반역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황 너머 변화의 희망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멈춰있는 편안함이 아니라 역경을 뚫고 성장하는 생명의 속성을 깨달아야 한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있는 것이고 에덴을 탈출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타성에 젖을 때 에덴으로 귀환하고 싶다. 아담이 에덴을 탈출한 것처럼 나는 오늘 일상의 타성을 벗어나려 한다. 그래서 새로운 반역을 꿈꾼다. 에덴 탈출은 반역이고, 창조이고, 생명의 솟구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