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정글에 사는 어느 원시 부족사회에서는 노인이 한 사람 사망하면 한 권의 백과사전이 사라졌다고 얘기한다.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주변 환경과 부족 구성원 간의 다양한 체험을 통해 축적했던 삶의 지혜를 더 이상 함께 나누지 못하는 기회의 손실이 아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쌓인 정보와 지혜는 한 권의 백과사전에 비유할 만하다. 원시시대에는 구전을 통해 일부 전달되기는 하겠지만 대부분의 생생한 지식과 지혜는 노인의 사망과 함께 저장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문명사회에서는 문자와 영상 등의 기록을 통해 생산된 정보와 지식을 일반 대중과 공유하면서 후대에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노인처럼 한 권의 백과사전이 사라지지 않고 누적적으로 축적된다. 문자의 발명은 대략 기원전 20세기경의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류가 당대에 습득한 정보·지식과 지혜를 기록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축적하여 후대에 전승하기 시작한 것은 기껏해야 5천년이 채 되지 않는다. 언어 사용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5-10만년 정도라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인류 문화의 기원은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이 기간을 넘어설 수가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언어구조를 매개로 한 합리적 사고와 문화 프레임을 가지지 못하거나 그 정도가 낮은 것은 ‘야만’, ‘미개’ 또는 ‘비합리’라고 부르며 열등한 것으로 무시한다.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의 결정적 차이도 상징과 같은 추상적 개념 능력 여부라고 한다. 이러한 능력은 언어를 매개로 한 사고력이다.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생성된 합리적 의식의 관점에서 인간의 우열을 재단하려는 교만이 보인다. 그런데 삶의 지혜와 행복을 모두 합리성, 경제성, 문화적 척도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다윈 이래의 진화생물학자들이 지층과 화석을 분석하여 연구한 바로는 인류가 침팬지와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서 독자적으로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을 약 800만 년 전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직립보행을 했던 인류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이 대략 400만전이다. 그 후에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릭투스를 거쳐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것이 대략 25만 년 전이라고 한다. 이 호모 사피엔스가 동아프리카로부터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10만 년 전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오랜 세월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기 시작하여 진화하는 동안 수많은 환경변화를 겪으면서 적응해왔다.
인류는 멸종하지 않고 수백만 년 동안(더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의 생명체가 탄생한 수억 년 전부터) 지구의 환경 조건에 적응하면서 현재까지 생존해왔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지질·지각, 기후의 변동, 생태계의 생성과 소멸과 같은 생존환경의 변화에도 오롯이 존재하기 위한 적응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했던 생존 시스템의 지혜 때문이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된 이러한 생존의 지혜는 언어적 논리 구조가 아닌 생물학적 방법으로 우리 몸의 유전자에 차곡차곡 쌓여 전해져 왔다. 유전자는 수많은 세월동안 환경에 적응해온 인류 생존시스템의 기록인 것이다. 이와 같은 체험적 지혜는 아프리카 백과사전 노인처럼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능과 함께 원초적 무의식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노인의 지식이 한권의 백과사전이라면 우리의 집단무의식의 지성과 원형(칼 융의 표현에 따르면) 또는 유전자에 녹아있는 수백만 년의 지혜는 전 세계의 도서관을 다 합쳐 놓은 것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양이 되는 셈이다. 칼 융은 이러한 관점을 집단무의식, 원형 등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말할 수 없이 심오한 영성, 신비스런 영감, 번뜩이는 지혜, 직감적인 통찰 등은 모두 억겁의 세월 동안 무수히 쌓인 무의식의 지혜에서 떨어져 나온 한 조각 먼지 같은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일부 종교가들이나 지성인들이 이러한 신비적 힘의 존재를 알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했음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의식의 지혜는 언어 이전의 순수한 몸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이라 우리의 언어적 의식은 그것을 쉽게 알아보지 못하고 많은 경우 그냥 흘러 보낸다. 침묵 속에 의식을 내려놓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데, 이 문명사회에서는 합리적·경제적 논리의 잣대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서열의식, 비교의식, 손익계산과 같은 셈법에 너무 젖어있기 때문에 오롯이 존재하기 위한 이 생명의 지혜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이 오롯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생명의 지혜를 ‘아주 오래된 내안의 행복 가이드’라고 부르고 싶다. 수백만 년 이상 인류가 축적한 삶의 지혜를 어찌 한 마디로 부를 수 있을까 마는 우리를 존재의 행복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런데 이 행복 가이드는 어린애 같은 마음을 좋아한다고 한다. 언어적 사유로 따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으며 자기를 믿고 따르고,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선입견을 접고 깊은 침묵 속에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음만이 그 엄청난 생명체 집단지성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자기 전에 이 ‘백만 년 행복 가이드’를 통해 하느님의 평화가 나에게 깃들기를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