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사랑과 꿈을 펼치는 수정종합노인복지관입니다. 저는 아나운서 유광영입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네요. 이제 장마철로 들어····”
마이크 앞에 서면 떨리는 것은 여전하다. 여러 사람에게 소식과 사연을 흐트러지지 않게 전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을 떨치지 못한다. 작은 실수 정도는 애교로 봐주겠지 하고 애써 여유를 가지려 했지만 카메라를 향하면 여지없이 긴장된다. 첫 데이트 때와 같이 가슴이 뛰었다.
나는 이런 떨림과 두근거림이 나는 싫지 않다. 내가 이 순간 오로지 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생생히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긴장과 흥분 뒤에 짜릿한 쾌감이 따라온다.
학창 시절 라디오 방송에서 음악을 내보내며 사연을 전해주는 DJ와 아나운서가 참 부러웠다. 여러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내는 말솜씨와 순간순간 재치에 감탄하였다.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화제로 폭넓게 소통하는 그 일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듣고 싶은 음악을 엽서에 적어 보내 청하고 방송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가슴 설렜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많지 않았던 그 시절, 한밤중 이불 속에서 듣는 음악방송은 젊은이들의 사연과 유행이 교차하는 통로였다. 방송이 추억과 마음을 이어주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세월이 흘러 공직에서 정년퇴직한 후 조정옥 선배의 권유로 수정노인종합복지관 방송반 일을 시작하였다. 실제 방송국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 스튜디오를 갖추고 캠코더와 마이크 믹싱 장비도 있다. 스튜디오에서 마이크와 카메라 앞에 앉으니 어렸을 때 방송에서 보았던 멋진 DJ와 아나운서가 오버랩 되었다.
공중파를 통해 시청했던 DJ와 아나운서의 방송을 내가 직접 출연하고 제작하게 된 것이다. 추억 속의 장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잘하려는 의욕에 당장 방송 관련 교재를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다. 유튜브에는 방송인이 되기 위한 강좌가 여러 개 업로드되어 있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것저것 참고하며 방송 기획서와 큐시트를 작성하였다.
일주일 동안 모은 사연을 정리하여 음악과 함께 방송할 때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얼굴 표정에 신경이 쓰였다. 세월을 소환하여 추억 속의 사람들과 함께 했던 사연을 전하며 나도 몰래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같은 세대를 살아왔기에 정서적 스펙트럼이 비슷하였다.
삼각지 근처에서 만났던 옛사랑이 생각난다며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를 신청한 한 회원의 사연을 전할 때에는 머릿속에 삼각지와 용산구청 사이의 자주 걸었던 거리가 떠올랐다. 보도 블럭을 덮은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몇 번을 왔다 갔다 해도 다리 아픈 줄 모르던 때였다. 사연을 보내준 분이 그 노래를 신청한 심정에 충분히 공감된다. 지금은 철거하고 사라져 버렸지만 한 때 명물이었던 삼각지가 그리워진다.
데이트한다고 하면 대개 영화를 보거나 고궁을 산책하고, 경양식집에서 식사한 후 공원이나 거리를 거닐던 시절이었다. 때로 미술관과 음악 감상실에 가기도 하고 서울 근교의 왕능을 다녀오기도 했다. 젊은 그 시절에는 무엇을 하든 만나서 꿈과 희망을 얘기하며 가슴이 뛰었다. 방송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둘이 마주 보며 따라 부르기도 하였다.
복지관 방송을 통하여 음악과 함께 회원들의 옛이야기를 전하다 보면 저마다 기쁘고 행복했던 사연과 마주하게 된다. 주름살 속에 잠들어 있던 그 시절 아름다운 이야기가 빛바랜 사진 속 풍경처럼 슬며시 살아나왔다. 흑백 사진이 칼라 사진으로 변하는 듯 생생해진다.
아름다운 추억은 저장된 행복이다. 냉장고에서 간식을 꺼내 먹듯 가슴속 행복 한 조각을 꺼내어 여럿이 나눌 때 모두가 미소 지을 수 있다. 그래서 추억을 깨우는 방송은 행복을 깨우는 새벽 종소리와 같다. 한 사람 한 사람 옛 사연을 불러오는 방송 시간이 내게는 경건하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수정노인종합복지관에서 추억을 낚아 방송의 꿈을 펼치고 있다.
방송에 사연을 보내준 회원 여러분과 청취자에게 감사드린다. 아울러 여기저기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방송반에 참여토록 추천해준 조정옥 선배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모두가 수정노인종합복지관을 통하여 맺어진 인연이다.
학생시절 적은 용돈에 당구장에 가보기가 힘들었지만 복지관에서는 사회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당구와 포켓볼을 즐길 수 있다. 취미를 바탕으로 동호회 모임을 갖고 새롭게 친구를 사귀며 또 다른 활력을 맛보게 한다. 노년기에 이렇게 꿈을 펼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낀다.
나는 방송반 일 외에 복지관에서 포켓볼과 드럼을 배우며 내 안의 표현 욕구를 털어내고 있다. 즐거움이 함께 하는 배움은 경건한 종교의식과 같다.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고 나면 간절한 기도를 마친 것처럼 근원의 바닥에서 힘이 솟는다. 깊은 삼매경에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우리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는 힘든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에 원하던 꿈을 제대로 펼치기가 어려웠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슴에 품었던 소망을 내려놓아야 하는 아픔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사연조차 아름다운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아픔을 숙성시켜 사랑스런 추억으로 승화시켰다. 우리는 자신을 편안히 바라볼 만큼 성숙하였다.
이제 복지관 방송에서 그 이야기 보따리를 홀가분하게 풀어놓을 때가 되었다. 내가 말하면 사연이지만 방송에서 전하면 새로운 인연이 될 수 있다. 오늘 새로운 인연을 만나러 나는 복지관으로 향한다. 추억을 낚아 꿈을 펼치기 위해서···· 도전하는 꿈이 있는 한 하루하루가 설레는 삶이다. 수정복지관과 함께 하는 하루가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