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첫 키스

영화 - <그리스인 조르바>

by 낭만천사 유광영

분당 인생학교의 ‘힐링 시네마’ 시간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관람했다. 이 영화는 흑백 TV 시절인 70년대 말 주말의 ‘명화극장’시간에 아마도 한 번 본 것 같다. 그때는 어느 한 인간의 모험담으로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에 끌려 만화책 보듯 가볍게 보았을 뿐 별 감흥을 받지는 않았다.


세월이 꽤 흐른 후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읽었을 때 작품 속 캐릭터가 주의를 끌었다. 거칠고 다양한 현장경험과 치열한 삶을 겪고 나서 인생을 관통하는 통찰을 얻은 듯한 조르바의 거침없는 행동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제도에 나선 선승(禪僧)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어느 순간 드러나는 인간의 탐욕들, 자아도취 속에서 살다가 삶을 마감하는 여인, 욕망을 숨기고 제도와 규범으로 박제된 수도자들의 가식과 허세를 비웃으며 세상을 달관하는 그는 큰 자유인처럼 다가왔다.


반쯤 잠들어 몽롱한 상태에서 가치판단이 마비되어 무리에 끌려다니는 군상(群像)들은 지금 이 시대의 현상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어리석은 무리에 따르는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스스로 상처를 만드는 인간의 나약함이 애매한 희생양에 의해 덮어질 수 없다. 머리가 좀 모자라는 미미코라는 청년만이 소멜리나를 죽인 마을 사람들에게 “살인자”라고 외친다. 머리가 모자랄지언정 가슴이 모자라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 시대에 이런 미미코가 그리워진다. 가슴에 손을 얹고 침묵 속에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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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유를 가지고 이 영화를 다시 감상하다 보니 펼쳐지는 이야기의 재미, 돋보이는 캐릭터와 함께 우리 삶의 흐름을 떠받치는 근원적인 동력이 느껴졌다. 동서양과 시대를 초월해서 인간이 공통으로 겪는 고통과 평화에 대해 성인들이 이미 가르침을 펼쳐왔다. 깨닫고 행동하는 이가 극히 드물 뿐이다. 조르바의 대사를 통해 다시 한번 그 통찰을 살펴본다.


조르바는 버질에게 너무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쯧쯧, 당신은 너무 많이 생각해요. 그게 당신의 문제예요. 배운 사람들과 식료품 가게 주인들은 무엇이든 재죠. 내가 만약 당신이었다면, 난 나 같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할 겁니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시 사람이 될지?”


생각과 인식의 틀에 갇혀 우유부단한 버질에게 조르바가 던진 말은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의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과 같은 맥락이다. 억만 년을 내려 온 영혼의 울림을 어찌 문자에 담을 수 있겠는가? 언어시대 이전부터 영혼은 계속 마음에 노크를 해왔다. 영혼의 울림이 문자화되었다면 이미 생생함을 잃고 박제된 것이다. 박제된 새가 공중을 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오직 날아가는 새를 본 사람만이 박제된 새에게서 날갯짓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사람을 볼 때 그는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가 그리스 사람이건, 터키 사람이건 내가 왜 신경써야 하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난 내가 먹는 빵을 두고 맹세했어요. 이제 그런 것조차 묻지 않겠노라고. 좋고 나쁨 그게 무슨 차이가 있어요? 우린 결국 똑같이 끝나는 인생들이에요.


사람은 불확실함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확실한 흑백 프레임 안에 모든 것을 가두어 놓으려 한다. 그렇게 잘 하는 사람일수록 능력을 평가받는다. 아군과 적군, 신과 악마,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천당과 지옥 이중 어느 한 편에 몰아넣어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야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만들어내 허상과 우상에 우리의 판단기준을 모두 맡겨 버린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만 삶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조르바는 강조한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조르바, 잘 해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영화는 1초에 24~30장의 정지 영상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 눈의 망막에는 앞 영상의 잔상이 남아 있고 그 잔상이 현재의 영상과 겹쳐서 우리에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현재는 바로 앞의 순간(과거)과 함께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또한 우리의 뇌는 과거 기억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를 능동적으로 그려 나간다.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미래가 달려온다. 과거의 중력 가속도는 현재를 관통하여 달린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과거를 등에 업고 미래에 한 발을 딛고 서 있는 셈이다. 우리의 뇌에서 과거가 없다면 미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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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거는 현재가 아니다. 어제 비가 왔다고 맑은 오늘 우산을 쓰고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내일은 현재가 아니다. 내일 바람 불어올 것이라고 해서 고요한 지금 옷깃을 여미고 있을 일이 있는가? 준비하는 것과 반응하는 것은 다르다. 과거와 미래는 머릿속에 있고, 현재는 눈앞에 있다. Carpe Diem!


Carpe Diem은 허상의 과거와 미래를 붙잡아다가 현재에 풀어놓는 것이다. 햇볕 앞의 안개처럼 사라진다. 고뇌와 번민도 이와 같다. Carpe Diem은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즐기되 영화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현재 실존하는 자리는 영화 속이 아니라 영화관의 관람석이기 때문이다. 고뇌와 번민도 이와 같다.


우리는 진정 무엇에서 위안을 얻는가? ‘부불리나’는 죽을 때 그동안 멀리했던 십자가를 들고 신을 찾는다. 그러나 공허하다. 신은 저 멀리에 있다. 이때 앵무새가 그녀의 전 애인 이름 ‘카나바로’를 외친다. 조금 위안받는다. 하지만 추억은 아스라이…. 손에 닿지 않는다.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마을 노파들이 몰려들면서 부불리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조르바는 급히 노파들을 내쫓고 부불리나의 손을 잡는다. 부불리나는 조르바를 껴안으며 그의 품속에서 편안히 죽음을 맞는다.


신은 저멀리

추억은 아스라이

오직 그 사람만이 내 앞에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받을 뿐이다. 관념 속의 신, 추억 속의 일을 쫓아 현재 이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조르바는 어쩜 이처럼 과거와 미래를 통찰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성자(聖者)인지도 모른다. 무너지는 갱도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서 고치는 일, 케이블로 광산을 연결하는 기발한 생각을 한 것, 과부 소멜리나가 동네 남자들에게 조리돌림으로 해코지당할 때 의연히 나선 일, 추억에 젖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부불리나(마담 오르탕스)를 부활시켜 생기를 넣어 주는 일, 버질에게 소멜리나를 찾아가도록 권유하는 행동에서 성자(聖者)의 그림자가 엿보인다.


“사는 것은 다 골치 아픈 거예요. 죽음만이 아니죠. 살아있다는 것은 허리띠를 풀어버리고 골치 아픈 일을 찾아 나서는 거예요”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화하는데 인간은 항상 불변에 애착을 느끼므로 고뇌와 번민이 함께 한다.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에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 하여 고통받는다. 그러니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되는 번뇌와 고통의 연속이다. 조르바는 이 모든 것과 함께하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방송에서 소개할 때 작가 ‘카잔차키스’를 ‘가장 첫 키스’로 발음하는 것처럼 내게 들렸다. 그 뒤로 나는 이 소설의 작가를 ‘카잔차키스’ 보다는 ‘가장 첫 키스’로 기억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카잔차키스(가장 첫 키스)의 메시지는 그의 묘비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자유이다. 종교적·문화적 틀, 관습의 틀, 관념의 틀 안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런 틀이 우리의 영혼을 옭아맬 때 과감히 그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행동에는 용기가 따른다. 조르바는 처음에 그 점을 분명히 하였다.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헤어지기 전 바닷가에서 조르바가 버질에게 한 말 또한 같은 맥락이다.


“사람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감히 자신을 묶은 로프를 잘라내어 자유로워질 엄두를 내지 못하지요.”


갈등과 번민이 없는 성장은 없다. 영화 속 인물이 어떤 사건을 통하여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우리는 공감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버질이 조르바에게 댄스를 가르쳐달라고 청하면서 함께 웃는다. 버질이 춤을 추는 행동은 그가 기존 관념의 틀에서 벗어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춤은 영혼을 깨우는 ritual(의식)이다. 변화의 순간에 우리는 ritual이 필요하다. 입학식, 결혼식 모두 변화됨을 선언하는 ritual이다. 자기모순 같지만, 광기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기존의 광기에서 벗어나는 약간의 광기는 필요하다. 춤을 통해서 버질은 조르바가 말한 광기를 얻게 된다.


내 생애 가장 첫 키스(여기서는 카잔차키스가 아니다)는 비 오는 여름날 첫사랑과 전봇대 옆을 지나다가 느닷없이 우산 속에서 하였다. 고장난 자명종 소리처럼 심장은 제멋대로 뛰어다녔고, 나는 오래된 터부에서 벗어났다. 가장 첫 키스는 카잔차키스가 말했던 자유의 작은 실천이었다. 약간의 광기가 필요한 ritual이었다.


장르 : 모험, 드라마

개봉 : 1964년

국가 : 그리스, 영국, 미국

러닝타임 : 142분



- 낭만천사 유광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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