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된 기억의 감옥에 햇빛을

영화 - <굿바이>

by 낭만천사 유광영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얼어붙은 과거를 안고 오늘을 산다. 기억의 감옥에서 냉동된 추억은 차가운 냉기를 흘려보내 자신도 모르게 행동의 체온을 앗아간다. 동결된 과거를 해동시키지 않는다면 나머지 인생에서 진정한 삶의 온기를 함께 나누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 숨기고 싶은 과거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해동의 순간이 아무에게나 오는 것은 아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에 의해, 때로는 사랑하는 이의 위로와 격려에 의해, 혹은 종교적 구원으로 그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NK 에이전트 사장 이쿠에이, 다이고의 동료직원 키미코, 목욕탕 주인 할머니, 아내 미카 모두 다이고의 아픔을 이해하려 하고 격려하는 따뜻한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주위에 있다면 그는 행복에 한발 가까이 있는 셈이다. 그런 사람이 주위에 있지만 인연을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운명이 아니라면 그의 닫힌 마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다이고는 자기 일에 성실하고 아내 미카를 사랑하는 따뜻한 성품으로 인해 주위로부터 상처를 극복하는 힘을 얻게 된다.


이 영화는 장례 과정을 매개로 따뜻한 인간들로부터 전해지는 연민을 통하여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해빙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 부모와 자식, 가족에 대한 깊은 사유가 더해지면서 다이고의 무의식은 아버지에 대한 연결을 추구하게 된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마지막 이별식인 납관(納棺) 현장에서 경험하는 유족들의 다양한 태도는 다이고의 추억 해빙을 위한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일을 마치고 간간이 연주하는 그의 첼로곡은 기억의 감옥을 여는 열쇠 꾸러미 소리이다.


악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백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다이고는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NK 에이전트 사장 이쿠에이의 카리스마와 죽은 자에 대해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엄숙하고 정성스럽게 염습하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이끌려 납관(納棺) 일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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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습(殮襲)할 때 가족들 반응은 생전 고인과의 관계를 드러내었다. 살아있는 자의 아름다움을 죽은 후에 발견하는 역설적인 경우도 보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죽은 자의 정체성을 뒤늦게 깨닫는 넋두리도 들었다. 죽음이 불러오는 갖가지 의미는 살아 있는 자가 결정할 뿐이다.


야마가타의 차가운 겨울, 자욱한 안개 속에서 다이고와 이쿠에이를 태운 자동차가 서서히 뚜렷해지는 첫 장면은 이 영화의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다이고의 아버지가 왜 애인과 함께 가족을 떠났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다이고가 죽은 아버지와 화해함으로서 냉동된 추억을 해빙시켜 행동의 체온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엄숙하면서도 신성하게 진행되는 염습(殮襲), 여러 형태의 죽음과 유족의 반응을 바라보며 그는 삶에 대한 의식 세계에 성숙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염습 현장은 그에게 삶을 새롭게 깨닫는 수행의 장이었다. 동결된 추억을 서서히 해빙시킬 준비의 장이다. 아버지가 물려준 카페의 오래된 LP 디스크, 첼로에 들어있던 조약돌은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독거노인의 사체를 염습하고 온 날, 아내 미카가 만들어 준 생닭 요리를 보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느닷없이 욕망을 느껴 정신없이 미카의 옷을 벗기고 껴안는다. 강렬한 삶의 의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틈새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삶의 환희를 자극하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극과 극은 통하나 보다.


이 일을 겪고 나서 다이고는 추억을 살리며 다시 첼로를 연주하고 싶어진다. 죽음에 대한 극한 의식이 수면 아래에서 터뷸런스를 일으켜 무의식의 과거를 흔들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첼로를 꺼내다가 울퉁불퉁한 조약돌을 발견한다. 그의 부모와 함께 개울가를 거닐었던 행복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봉인된 조약돌이다. 그러나 그 추억을 개봉하기에는 아직 그의 마음이 열리지 못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오래된 첼로의 현을 조율했듯이 그의 마음은 좀 더 조율을 요구한다.


야마가타의 하천에 백조가 날아들고 연어가 돌아온다. 죽음을 무릅쓴 회귀본능은 자연의 선택이다. 다이고의 무의식은 그런 자연스러운 힘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돌아가야 할 동결된 추억이 있다. 수면 아래에서 꾸준히 해동될 날만 기다리며 계속 연결망을 찾아 헤매는 신경세포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다.


다이고가 첼로 케이스에서 나온 돌을 버리지 않은 것은 그 신경망의 보이지 않는 작용이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반을 듣는 도중에 아내 미카는 다이고가 내려놓은 돌을 무심코 집어든다. 결말이 예상되는 복선이다. 수면 위의 의식으로는 인지하지 못하나 신경세포 수준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 우리는 그 수준의 활동을 존중해야 한다. 깨어있고 열린 마음이다.


다이고의 직장을 알게 된 아내 미카는 화를 내고 염습과 같은 천한 일을 그만두라며 친정으로 떠난다. 하지만 어진 성품의 다이고는 고인과 유족에게 마지막 이별을 존엄하게 해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이고는 죽은 자의 마지막 길을 엄숙하게 안내했고, 그만큼 삶에 대한 성찰이 쌓였다.


계절이 바뀌어 백조는 북녘으로 돌아가고 들판에는 새싹이 돋아난다. 때가 무르익고 있다. 임신한 아내 미카가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생명의 등장을 알린다. 다이고가 생닭 요리를 보고 흥분하여 미카를 껴안은 날 잉태한 듯하다. 서서히 다이고의 동결된 추억의 족쇄가 풀린다는 전조로 보인다.


다이고가 목욕탕 할머니를 염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미카는 남편의 직업에 대해 가졌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다. 머풀러까지 챙기면서 고인의 생전 품격을 정성스럽게 살려내는 남편의 진지함에 아내 미카도, 다이고의 친구 야마시타도 울컥해지도록 마음이 숙연해진다.


다이고는 옛날에 부모님과 같이 갔던 하천 자갈밭에서 아버지의 돌 편지 얘기를 아내에게 들려주며 둥근 조약돌을 찾아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그의 내면에서는 이미 해빙의 몸부림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모습은 이 영화의 상징적 장면으로 포스터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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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다이고의 아버지가 고독사했다는 전보가 날아든다. 다이고는 아버지를 한사코 거부하며 끝까지 외면하려 한다. 동료 직원 키미코가 회한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아픈 과거를 고백하면서까지 처절하게 설득하지만 다이고는 반사적으로 반발하며 절규한다. 사무실 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간다. 반동 없는 터닝 포인트는 없다.


다이고를 마주친 아내 미카가 뒤에서 따뜻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다. 순간 길거리에 멈춰서서 잠시 상념에 잠기고, 그의 가슴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움이 치밀어 올랐다. 포물선의 정상에서 궤도는 바뀐다. 다시 사무실로 뛰어 들어온 다이고에게 NK 에이전트 사장 이쿠에이는 말없이 차 키를 던져 주고 다이고는 즉시 아버지에게로 출발한다.


다이고가 염습하다가 죽은 아버지의 손에서 발견한 둥근 조약돌은 클라이맥스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감동 뿐이다.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모든 증오심은 용광로에 던져진 얼음 한 조각이다. 눈물을 흘리며 다이고가 내뱉은 첫마디는 “우리 아버지, 생각났어… 아버지.”였다. 기억의 감옥에 동결된 추억이 풀려나고, 희미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해진다. 신이 내려준 회복탄력성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 충성한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모두 캐릭터의 감정과 내면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전달하는 표현력이 뛰어났다. 특히 NK 에이전트 사장역의 야마자키 츠토무는 무게감 있는 이미지에 말없이 분위기를 전환시켜 상황을 끌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아내 미카역을 맡은 히로스에 료코는 백치미가 엿보이는 순진한 모습으로 사랑스러운 일본의 전통 아내상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다이고가 납관하는 동작은 죽은 자 앞에 펼치는 아름다운 공연 예술이다.


나이를 떠나 모두에게 깍듯한 인사, 타인에게 폐를 끼쳤을 때 수치심을 갖는 태도, 극히 절제된 감정 표현, 정갈하게 무릎 꿇는 자세 등 일본인 특유의 예의범절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생활 문화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는데 개인의 내면에 내재된 작은 억압장치로 느껴졌다. 영화 음악가 히사이시 조의 아름다운 첼로 선율은 이 영화의 울림을 분위기 있게 장식하였다. 힐링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만한 영화이다.



개봉 : 2008.10.30.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국가 : 일본

러닝타임 : 130분



- 낭만천사 유광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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