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황금 연못>
핑계의 사전적 의미가 첫째는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공연히 내세우는 구실”이고 둘째는 “잘못한 일에 대하여 구차스럽게 말하는 변명”이라고 정의되었다. 부정적 뉴앙스의 이 두 번째 정의가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핑계에 대한 어감이다. 그렇지만 관계가 팽팽한 상황에서 유능한 구원투수는 아마 핑계가 아닌가 싶다. 영화 ‘황금 연못’을 나는 그렇게 보았다.
먼저 손을 내밀기가 어색한 순간에 핑계는 용맹을 발휘한다. 구차스럽지 않다. 내미는 손은 따뜻함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패스워드이다. 내가 굴복한 것 같지만 함께 윈윈하는 큰 걸음이다. 핑계는 우리에게 자유로움을 더해 준다. 용기있는 핑계는 따뜻한 관계를 불러온다. 그러니 핑계를 걱정하지 말고, 핑곗거리를 걱정해야 한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 그리고 장면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아비새 한 쌍은 노먼과 에텔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치매 증상이 있고 시니컬한 노먼과 명랑 소녀 같은 에텔은 늘 까칠한 말로 티격태격하지만 오랜 세월 금술 좋게 살아온 노부부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쓰러진 노먼과 에텔이 보여주는 애정의 깊이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누구나 이런 배우자를 원하지만 먼저 스스로 먼저 그런 배우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애정이 지속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대사는 배려와 존중이 둘 사이에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준다. “알아요, 노먼?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사람이예요. 그러나 오직 저만이 그 사실을 알죠.”, “당신은 빛나는 갑옷을 입은 나의 기사님이어요. 나는 당신 뒤에서 당신을 꼭 잡고 있을 거예요.”, “거의 죽을 것같이 무서웠어. 그래서 여기 당신에게 뛰어 온 거야. 당신의 예쁜 얼굴 보려고.”. 에텔은 오직 나날이 쇠약해져 가는 노먼이 걱정될 뿐이다.
이에 반해 노먼과 딸 첼시의 사이는 그렇지 않았다. 첼시는 자신이 아들이었다면 아빠가 잘해 주었을 거라는 생각에 늘 사로잡혀 있다. 아빠에 대한 강박적인 콤플렉스는 오랫동안 첼시의 마음 한구석을 그림자로 덮고 있었다.
빌(소년 빌리의 아버지)과 파치시게임을 할 때 승부에 집착하는 노먼을 보고 첼시는 에텔에게 말한다. “엄마 알아요, 그거? 내가 평생 아빠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거. 그는 나를 미치게 해요. 3,000마일이나 떨어져서 만나지도 않는데 나는 아직도 그에게 대답을 하고 있어요.” 아버지에 대한 정서는 소녀 시절에 고착된 채 첼시의 행동에 틀을 씌우고 있었다. “인생은 행진곡이야, 첼시야.” 에텔은 첼시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행진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 그렇다. 그러나 첼시는 아직 아빠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날 핑계를 찾지 못했다. 어느날 노먼 부부가 머무는 황금연못 별장에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딸 첼시가 노먼의 생일을 핑계로 찾아오면서 그들에게 화해할 핑계가 싹튼다. 그 매개자는 첼시의 남자친구 아들인 열세 살 빌리이다.
상대하는 사람마다 까칠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비꼬면서 괴롭히는 노먼과 반항아 같은 꼬마 빌리는 아름다운 호수 황금연못을 함께 체험하면서 서로 속마음을 알아가고 우정을 쌓는다. 빌리는 노먼과 함께 송어 낚시도 하고,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고, 망가진 현관문도 노먼과 함께 고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본성이 깨어나는 대자연을 정직하게 마주할 때, 비오는 날 대순(대나무의 어린싹) 솟듯이 힐링의 순간이 찾아온다. 노먼이 빌에게 얘기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 황금 연못에선 관대함이 자유롭게 흐르네”. 이 영화에서는 힐링의 순간마다 황금연못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보여준다.
벽난로에 불을 붙이다 거실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에텔과 빌리가 가까스로 끈다. 노먼은 나이든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짜증이나 빌리에게 소리 지른다. 에텔은 빌리에게 말한다. “그는 네게 소리지르지 않았어. 그는 인생한테 소리 지르고 있는 거야. 그리고 기억해라. 그는 그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그는 단지 그의 길을 찾고 있는 거야. 그것 뿐이야. 너랑 똑 같아.” 말없이 에텔을 바라보며 빌리는 늙은 노먼에 대해 연민을 느낀다.
노먼과 빌리는 호수의 위험지역인 푸가토리 계곡을 지나 낚시하러 간다. 빌리는 보트 앞쪽에서 암초 사이의 물길을 안내하고, 노먼은 바위를 피하여 조심스럽게 운전한다. 긴장된 시간 둘 사이의 호흡이 맞아가고 있다. 어두워질 무렵 돌아오면서 노먼은 앞에서 바위의 상황을 살피고 빌리에게 보트 운전을 맡긴다. 빌리의 오작동으로 보트가 급발진하여 노먼은 물 속으로 튕겨 나가다. 빌리가 뛰어들어 가까스로 구조한다. 어둠 속 호수에서 바위를 붙잡고 몇시간을 버티던 중 에텔과 찰리가 나타나 그들을 발견한다. 어려움과 힘든 시간은 정서적 접근의 접착제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첼시는 아빠가 빌리하고는 쉽게 친구가 되면서 왜 자기와는 그렇지 않았냐고 에텔에게 불만을 쏟아낸다. 첼시는 자기가 브뤼셀에서 결혼한 사실을 아빠에게 얘기해도 아마 아빠는 축복하기는커녕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며 노먼은 자기밖에 모르는 꼴통 영감이라고 비하한다. 에텔은 첼시에게 따귀를 올리면서 그 꼴통 영감쟁이가 바로 내 남편이라고 말한다. 따귀를 맞은 첼시는 호수로 뛰어가 물속으로 뛰어든다.
마음을 리셋시키기 위해서는 때로 이 같은 충격이 필요하다. 리셋으로 태풍의 눈처럼 잠시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틈새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 틈새에서 에텔은 첼시에게 분명히 얘기한다. “나는 그가 나를 위해서 불길 속을 걸어온 걸 알고 있어. 그리고 널 위해서도 역시 불길 속을 걸어왔어. 네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넌 그를 자세히 보지 않은 거야”
빌과 함께 낚시를 하면서도 빌을 첼시라고 착각하고, 물속에 빠질 때도 첼시의 이름을 외칠 만큼 노먼의 마음 한 구석에 첼시가 들어앉아 있었으나 핑곗거리를 만들어 접속하지 못한 것은 그의 냉소적인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소년 빌리는 당초 노먼 부부와 함께 낚시하러 가고 싶지 않았으나 이 헛소리들이 다 뭔지 알아야겠다고 핑계를 대며 노먼 부부를 따라나섰다. 속 보이지만 용기 있는 핑계이고, 결국 따뜻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나이 든 노먼에게 그런 방향 전환이 쉽지 않은 일이다.
대망의 월터(황금 연못에서 가장 큰 송어)를 낚아 올린 것은 첼시와의 화해를 위한 서곡이다. 월터를 낚아 올린 기쁨에 노먼의 마음은 너그러워진다. 핑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로움과 화해의 타이밍을 월터가 제공했다. 노먼과 빌리는 월터를 호수에 다시 놓아준다. 월터를 낚고 의기양양하여 돌아온 노먼에게 첼시는 눈물을 흘리며 아빠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아빠와 화해를 여는 핑곗거리는 빌(소년 빌리의 아빠)과 브뤼셀에서 결혼했다는 소식이다. 노만은 기쁘고 환상적인 일이며 너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하며 활짝 웃는다. 첼시가 아빠에게서 듣고 싶어 하던 바로 그 대답이었다. 그 순간 관계의 온도는 패스워드의 입력을 받고 따뜻한 체온에 접속된다.
황금연못에서 빌리가 백플립 다이빙을 익혔다며, 남자애들에게는 쉬운 백플립 다이빙을 첼시는 하지 못했다고 노먼이 말하자 발끈한 첼시는 두려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다이빙대로 올라간다. 잠시 망설이다가 물 속으로 뛰어들고 결국 백플립에 성공한다. 모두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플립 다이빙을 성공시켜 자신감을 회복한 첼시는 이제 예전의 뚱보 소녀가 아니다. 노먼도 그런 첼시를 대단하게 생각한다. 화해의 피날레 핑계는 백플립 다이빙이었다. 황금연못을 떠나면서 노먼은 첼시에게 1921년도 대학 다이빙 준우승 메달을 선물로 주고 첼시는 노먼을 깊게 포옹한다. 아빠에 대한 뚱보 소녀 콤플렉스는 정리되었다.
영화 <황금연못>은 자연 속에서 우리의 기본 정서가 편안해지는 작용을 바탕으로 하여 까칠했던 인간관계를 치유하는 핑계의 중요함을 보여주었다. 핑계는 거북한 일이 아니다. 좋은 핑계는 관계의 윤활제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떤 핑계(패스워드)로 다른 이와의 불편한 관계를 체온에 접속시킬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핑계를 걱정하지 말고 핑곗거리를 찾아보아야겠다.
개봉 : 1981. 12. 04
장르 : 드라마
국가 : 미국
러닝타임 : 105분
- 낭만천사 유광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