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부조화 속을 방랑했던 따뜻한 영혼

영화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by 낭만천사 유광영

모든 유기체는 환경 적응적으로 행동한다. 특히 인간의 뇌는 여러 가지 적응 방법을 다양하게 시뮬레이션해 봄으로써 다른 동물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폭넓게 지구환경을 이용해 왔다. 언어의 사용은 인지와 경험을 공유하고, 축적하고, 세대 간 전수를 가능하게 했다. 조합된 인지는 상상력으로 작용하여 새로운 창의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이렇게 인지와 상상력은 인간의 적응을 비약적으로 도약시켰으나 때로는 인지의 부조화로 인해 고통받은 일이 생겨났다. 인지와 분별심이 인간을 현명하게 하였지만 또한 인간을 그 안에 속박시켰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신체 노화가 세월의 흐름과 반대로 진행되는 벤자민을 통해서 인간의 통념이 사랑과 행복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벤자민의 생부 토마스는 기형적인 아들의 출생에 충격을 받고 그를 양로원 건물 앞에 내다 버린다. 기대했던 상황과 너무 달라 받아들이기 힘든 인지 부조화를 느꼈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권위를 갖춘 사람일수록 이런 인지의 경직이 심하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인지 범위에 맞춰 인위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행동은 특히 정치인들이 심하다.


늙어가는 게 싫지만 그렇다고 젊어지다가 어려지고 결국 아기가 되어 죽는 것은 과연 좋을까? 아니면 그냥 그대로 젊은 상태에서 머무는 것이 좋을까? 그리고 진정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피아노를 가르쳐준 할머니와 벤자민의 대화는 이 영화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이 점점 늙어갈 때 나는 점점 젊어진다면요.”


“그렇담 슬픈 일이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봐야잖아. 끔찍한 책임이지.”


사랑이란 그런 끔찍한 책임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변한다. 현재의 모습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을 낳는다. 늙어 죽는 것이나 젊어지다가 갓난아기가 되어 죽은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 자신이 언제까지 살지 궁금해 하는 벤자민에게 양엄마 퀴니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종착역은 다 같아. 어떤 길로 가는지가 다를 뿐이지. 넌 네 길을 가는 거야, 벤자민. 아직 살아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


%EB%B2%A4%EC%9E%90%EB%AF%BC%EB%B2%84%ED%8A%BC%EC%9D%98%EC%8B%9C%EA%B0%84%EC%9D%80%EA%B1%B0%EA%BE%B8%EB%A1%9C%EA%B0%84%EB%8B%A4_%ED%8F%AC%EC%8A%A4%ED%84%B0.jpg?type=w1600


벤자민이 자란 양로원의 노인들에게 해탈한 듯한 삶의 태도는 일상적인 일이다. 그는 어린아이로서 늙은 사람들의 초연한 의식 세계에서 성장(?)했다. 여기 사람들은 젊은 시절의 짐을 벗어버리고, 날씨나 목욕물 온도 혹은 일몰에 더 신경 썼다. 현실에 대한 애착보다는 삶을 전체적으로 관조하며 하루하루를 새로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일곱 번이나 벼락을 맞아 한쪽 눈이 멀고 청력도 망가진 노인도 지금 살아있음을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한다.


아프리카 정글과 동물원 우리를 거치며 온갖 상황을 겪어온 피그미 아저씨 오티는 어느 날 갑자기 어린(몸은 늙은) 벤자민을 데리고 시내로 외출을 나온다.


“삶은 외로운 거야. 특히 우리 같은 사람은 더. 비밀을 말해줄까? 뚱보, 말라깽이, 꺽다리 모두 우리만큼 외로워해. 그들은 외로움을 무서워하는 게 다르지만”


그는 체험을 통해 깨우친 통념 너머의 세계를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양로원 생활만 알던 꼬마 벤자민은 난생 처음 시내를 다녀온 그날이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 날의 모험적인 행동에서 벤자민은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얼마 후, 마이크 선장의 예인선에 선원으로 승선하여 세계 각지를 다닌다.


남녀관계에서 끌림은 분석과 판단력의 문제가 아니다. 선입견 없는 순수차원의 교감이 작용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기준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진동하는 울림과 같은 메아리를 찾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은 내 안에서 침묵하는 지성의 손짓이다. 조건 없는 상황에서 눈빛 하나만으로 끌리는 것. 그런 순간은 흔치 않지만, 마치 신내림처럼 운명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저울질이다.


“기다리기만 했어요. 뭔가를 할 수 있는 때가 저절로 찾아올 거란 환상을 갖고 젊은 시절을 허비해버렸죠.”


영국인 유부녀 엘리자베스는 벤자민을 만나며 더 이상 세월과 줄다리기를 하지 않았다. 존재 의의를 드러내는 몸짓에 알아서 카펫을 깔아줄 만큼 세월은 관대하지 않다. 파도가 밀려올 때 서핑 보드에 올라타야 한다. 서핑 보드에 올라탄 순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벤자민과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인연을 교차했다. 전쟁터에 나서는 벤자민에게 엘리자베스가 쪽지를 남겼다.


“당신을 만나서 좋았어요.”


그렇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오직 스스로만이 책임질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벤자민을 그의 생부 토마스가 단추 공장으로 불러들인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 토마스는 그의 신분을 속이고 술집에서 벤자민을 몇 번 만났던 터라 그들은 이미 구면이다. 토마스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아들인 벤자민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한다. 생부를 처음 알게 된 벤자민은 집으로 돌아와 혼란과 인지 부조화 속에 갈등한다.


일곱 번이나 벼락을 맞고도 살아있음을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인, 현실이 싫으면 미친개처럼 날뛰거나 욕하고 신을 저주해도 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마이크 선장이 벤자민에게 던지는 화두는 무엇인가? 이심전심, 벤자민은 병든 토마스를 업고 동이 트는 호숫가 별장으로 간다. 화해는 이해심이 아니다. 화해는 타이밍이다.


토마스의 장례식이 끝난 후 벤자민은 데이지를 만나러 뉴욕에 간다. 그러나 데이지는 이미 연인과 함께 지내고 있고 잘 나가는 발레리나이다.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벤자민을 당황스럽게 맞이한다. 상심한 벤자민, 그는 데이지가 그렇게 원했던 그날 밤 그녀 마음을 지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날 이후 둘의 마음은 번데기처럼 우화(羽化)의 날을 기다리며 그리움의 고치(cocoon) 속으로 들어갔다. 사랑은 자존심이 아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이 작용하는데, 인간은 눈에 보이는 몇 가지만 그 원인으로 착각하고 있다. 데이지가 택시에 치어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몇 수십만 가지의 전제된 사건들이 있지 않았던가? 파리의 여자가 외투를 깜빡하여 다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때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길을 건너던 남자가 5분 늦게 출근하지 않았다면, 부티크의 여자가 포장을 늦게 하지 않았다면, 배달 트럭이 택시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친구의 신발 끈이 끊어진 것에서부터 부티크 직원의 실연과 택시 기사의 커피 마시는 것까지 모든 사건이 데이지가 사고를 당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삶은 누구도 통제 못 하는 수많은 상호작용의 연속이다. 그중의 하나의 사건만 없어도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교만이다. 겸허해져야 한다. 삶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이다. 기적은 신비가 아니다. 기적은 타이밍이다.


거꾸로 가는 벤자민의 시간과 제대로 흐르는 데이지의 시간이 교차하는 순간 서로를 원하는 그들의 영혼은 고치(cocoon) 속에서 깨어났다. 이런 운명의 시간에 인연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꽃 같은 행복이다. 그런 행복은 인지 부조화를 넘어선다. 온 삶을 다 바치게 된다. 벤자민은 데이지와 요트로 항해를 하고, 새로운 집을 장만하고 행복한 날을 보낸다. 그러나 데이지와 한참 행복한 순간에 벤자민은 깨닫는다.


“영원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정말 슬픈 일이지.”


동틀 무렵 호숫가 여름 별장에서 자신은 늙어가며 영원히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데이지도 깨닫는다.


다운로드 (1).jpg


데이지가 임신 소식을 알리자 벤자민은 인지 부조화를 느낀다. 자기와 같은 병을 갖고 태어날까봐, 자기는 점점 어려지는데 딸은 점점 커져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 데이지에게 기쁨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카페를 나서는 순간 무스만스크에서 사랑을 나눴던 엘리자베스가 결국 68세에 도버해협을 헤엄쳐 건넌 최고령 여성이 되었다는 뉴스를 TV에서 본다.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잘 키워줄 진짜 아빠를 찾아. 같이 늙어갈 아빠. 필요한 건 아빠지, 소꿉친구가 아니야.”


가슴이 미어지는 말을 꺼내고 그는 딸이 기억하기 전에 떠났다.


“아빠 노릇을 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을 텐데”


벤자민은 데이지와 딸 캐롤라인을 떠났지만 그리움은 곁을 맴돌다가 엽서에 실려 날아갔다.


“살아가면서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른 건 없다. 넌 뭐든지 될 수 있어. 꿈을 이루는데 시간제한은 없단다.”


거리의 수도자처럼 세상 어디를 떠돌아도 딸과 함께 할 수 없는 아빠의 애절함을 벗어날 수 없었다.


데이지와 딸 캐롤라인을 떠났다가 잠시 돌아와 폰차트레인 호텔에서 재회하는 순간에는 시간을 구부려서라도 이 둘을 계속 함께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시간을 구부려서라도….


“벤자민, 영원한 건 없어.”


“데이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해”


벤자민의 생체시간은 거꾸로 흘렀지만 데이지와 캐롤라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숙명을 받아들였다. 점차 늙어서 죽는 것도, 점차 젊어지다가 아기가 되어 죽는 것도 모두 고통이다. 모든 변화는 고통의 원인이다. 집착은 고통을 만든다. 통념은 사고의 집착이다. 통념에서 어긋나면 고통이다. 벤자민은 통념적 인지의 부조화 속을 방랑했던 따뜻한 영혼이다.


요즘처럼 정신없이 변화하는 디지털 혁명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인지 부조화가 발생하는 일이 가끔 있다. 어르신이 시설의 키오스크 앞에서 공포스럽게 서 있기도 한다. 그들도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피아노를 가르쳐준 할머니의 말이 이렇게 들린다.


“중요한 건 잘 치는 것보다 음악을 느끼는 거야.”

ㅡ> “중요한 건 부유하게 사는 것보다 인간을 느끼며 사는 거야.”


“느낌을 담아서 연주해.”

ㅡ> “인간으로 상대하고 인간으로 대화해.”



개봉 : 2009.02.12.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판타지, 멜로/로맨스, 드라마

국가 : 미국

러닝타임 : 166분




- 낭만천사 유광영 -













작가의 이전글운명은 하늘이 정하고 그 품격은 내가 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