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냉정과 열정 사이>
자존심을 묻은 자리에 그대가 피어있다면 그것은 운명
피렌체 거리의 골목은 소꿉 놀이터 같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벽 사이에서 삶의 냄새가 배어난다. 낡은 자전거가 어울리는 길목을 지나면 두오모 성당이 보인다. 손때 묻고 발자국 닳은 그곳에는 오래된 연인의 이야기가 쌓여있다.
준세와 아오이가 피렌체 두오모로 돌아온 것은 물살을 거슬러 강으로 회귀한 연어의 본능이다. 마음의 DNA에 각인된 그들의 사랑은 10년의 세월에 마모될 수 없다. 자신을 내 던진 운명적 사랑은 세월을 무릎 꿇렸다. 길게 당긴 활시위의 화살이 그렇듯 그들의 사랑은 삶 저편까지 멀리 갈 것이다.
진공청소기 같이 서로를 향한 흡인력은 어린 시절 상실한 부모의 애정을 대체한 애착인지 모른다. 준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아오이는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후 의붓 아버지 밑에서 늘 외로웠다. 잘 맞는 퍼즐 조각처럼 공허감을 채워 주는 끌림은 치명적이다. 매혹은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거부할 수 없다. 상대에게서 느끼는 안정감의 보상은 서로를 갈구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영화가 감동을 주는 것은 운명적 사랑에 대한 우리의 환상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에 감정 이입되어 느끼는 대리만족은 도파민의 분비를 자극하여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사랑의 롤러코스터를 간접 경험한다. 결국 우리는 환상을 추구하는 미몽(迷夢) 속에 자신을 맡긴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좀 더 높은 의식으로의 초월을 위해서는 자아가 짓는 환상 너머를 알아차리는 순간이 필요하다.
준세와 아오이는 첫 만남부터 밤새 그리워하며 학교, 찻집, 영화관, 도서관까지 늘 붙어 다녔다. 미래를 얘기하다가 10년 후 아오이의 생일날 피렌체 두오모에서 보내기로 약속한다. 서로에 대한 강한 끌림은 그만큼 반발력도 크다. 애착의 절정에서 미끄러진 자존심으로 준세는 아오이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완성해야 숙제는 미래의 몫으로 남겼다.
준세의 할아버지는 유명 화가인데 건강이 좋지 않다. 아버지는 준세 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젊은 애인과 함께 건달처럼 생활하며 할아버지의 유산에만 관심이 있다. 준세의 아버지는 아오이가 재산을 노리고 준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생각해 준세 몰래 그녀를 만나 돈을 주고 낙태를 요구한다.
아오이가 자기와 한마디 상의없이 몰래 아이를 지웠다고 믿었던 준세는 크게 화를 내고 아오이와 헤어진다. 아오이가 준세 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했고 아기는 자연 유산된 사실을 아오이 혼자만 알고 있었다.
준세는 미술품 복원 기술을 배우기 위해 피렌체로 유학을 와서 3년간 조반나 선생의 지도를 받는다. 취미로 시작했지만 재능이 있어 여러 자격시험에도 합격하고 공방에서 실력 있는 복원사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친구 다카시로부터 아오이의 소식을 듣고 밀라노에 가서 그녀와 재회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함께하는 남자와 행복해한다. 허탈한 심정으로 돌아오는데 바로 그날 그가 복원 중이던 치골리의 작품이 크게 훼손당하는 사건이 생긴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그 공방은 일시 폐쇄된다.
혼란한 마음에 일본으로 돌아온 준세는 아오이에게 장문의 펀지를 보내 그동안 사랑의 진실과 이제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하는 현실을 인정한다. 준세와 메미가 말다툼을 벌인 날 친구 다카시를 통해 아버지가 아오이에게 돈을 주고 낙태를 요구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계속 입원해 있으니까 준세의 아버지는 변호사를 불러 할아버지에게 상속 관계를 법률적으로 정리하게 한다. 이렇게 해놓으면 재산을 목적으로 아이를 밴 여자가 들러붙는 일도 없을 거라고 말하자 준세는 자기 아버지의 멱살을 움켜잡고 아오이를 모욕하지 말라며 아오이게 사과하라고 난리를 친다.
그러던 어느 날 조반나 선생의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준세는 장례식에 참석하여 애도한다. 장례식 후 공방의 옛 동료 직원인 다카나시는 준세가 예전에 복원 작업을 하던 치골리의 작품을 훼손한 범인이 다름 아닌 조반나 선생님이었다고 폭로한다. 그녀는 준세의 재능을 질투했고 다른 한편으로 준세를 연모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방은 곧 다시 문을 열 거라고 한다. 준세는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인다.
조반나 선생의 자살을 계기로 마음을 정리한 준세는 미술품 복원사로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아오이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짝사랑하는 메미와 정식으로 이별한다. 피렌체에 다시 와서 준세가 첫 번째로 복원한 작품이 치골리의 그림인 것은 다시 한 번 일어서려는 준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아오이는 준세의 편지를 훔쳐 본 남자 친구 마빈과 별거하면서 냉각기를 보내고 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늘 준세와의 추억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편지를 들쳐 보며 눈물짓는다. 마빈이 L.A.로 떠나면서 함께 가자는 청을 거절하고 아오이는 밀라노의 보석 가게에서 계속 일을 한다.
준세 또한 언제나 아오이를 가슴에 품고 예전의 그 피렌체 공방에서 미술품 복원사로 일을 하고 있다. 아오이의 생일인 5월 25일 날, 준세는 10년전 아오이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끌리듯 피렌체 두오모의 탑으로 올라간다. 거룩한 성지에서 죄의 사함을 받고 천국에 오르기를 간절히 원하는 순례자의 심정이다
멀리 피렌체 시내가 발아래 펼쳐지고 바람결에 머리칼이 깃발처럼 날린다. 햇살이 탑 위의 연인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간, 준세는 안절부절 하며 탑 위에서 서성거린다. 성당의 종소리가 장막을 걷는 신호처럼 울릴 때, 뒤돌아 마주친 4개의 눈동자.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외로 담담한 표정.
“큰일 났네.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사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어.”
그날 밤 숨차도록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뿐이었다.
아오이와 함께 피렌체 공원에서 거리 음악회를 듣는 순간 그들의 10년은 처음과 끝이 이어졌다. 같은 연주자, 같은 음악, 달콤한 키스까지. 운명의 숙제를 풀었다. 한 번 더 마음을 졸였다가 밀라노에서 라스트 씬(scene)을 맞은 것은 아오이의 자존심에 대한 배려이다.
개봉 : 2003.10.10.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멜로/로맨스, 드라마
국가 : 일본
러닝타임 : 124분
ㅡ 낭만천사 유광영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