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틸 앨리스>
구멍뚫린 기억, 새어나간 영혼, 남아있는 사랑
우리는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사다리 위에 걸쳐있다. 기억의 사다리가 사라진다면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은 추락할 뿐이다. 우리가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 위에서 사다리 위아래를 모두 볼 수 있을 때이다.
성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로맨틱하게 들리는 말 ‘영혼’. 영혼은 기억의 지층에서 울리는 메아리다. 영혼이 머무는 기억에 구멍이 뚫리면 영혼은 새어나간다. 가장 인간다운 면을 앗아가는 알츠하이머.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의 사다리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단편적인 영상의 조각들만 굴러다닌다. 그 순간까지도 앨리스에게 남아있는 사랑의 느낌. 그녀는 어눌한 말투로 "사랑"이라고 외친다.
이제 그녀는 누구인가? 사랑은 왜 영혼이 새어나간 자리에 남아있을까? 아마, 사랑은 생명 그 자체와 동격이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생명은 사랑을 원하고, 사랑은 생명을 키운다. 진정한 사랑은 새어나간 영혼보다도 더 깊은 곳에 있다. 바로 생명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그래서 완전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앨리스와 존 부부는 일류 대학의 능력 있는 교수이다. 남편은 자상하고, 의대생인 아들과 법대를 졸업한 큰딸, 그리고 연극배우인 막내딸이 있는 화목한 가족이다. 이 정도이면 누가 봐도 축복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축복을 담아 두기에 앨리스의 구멍 뚫린 기억은 너무 허술하다.
L.A.에서 열린 학회 강연에서 때 잠깐 기억이 멈춘 적이 있었고, 익숙한 콜럼비아 대학교 캠퍼스에서 조깅하다가 정신이 혼미해질 때 그녀는 갱년기 건망증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신경외과 검사 결과 알츠하이머가 의심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당황스러웠다.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남편 존에게는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젠장, 내 말 좀 진지하게 들어! 내가 느낀다니까! 내가 알아!
뇌가 죽어가는 기분이야. 내가 평생 이룬 것들이 사라질 거라구!”
공포에 질린 듯 앨리스는 존을 껴안고 울부짖는다.
유전에 의한 조발성 알츠하이머라는 것을 남편과 함께 확인한 앨리스는 결혼기념일에 모인 자녀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아들 톰과 큰딸 애나, 작은딸 리디아 모두 망연자실하고, 앨리스는 너희들이 걱정되고 미안하다고 흐느낀다. 앨리스는 학교 강의도 정상적으로 진행하지 못해 학생들의 컴플레인이 제기되어 결국 사실을 털어놓고 대학교수직을 그만둘 수 밖에 없다.
유전자 검사를 마친 결과 톰은 양성이고, 큰딸 애너는 음성이며, 막내 리디아는 결과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인공수정으로 임신 중인 애너의 아이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앨리스는 갈수록 기억이 사라져 남편과의 약속도 잊고 거리를 배회하는 자신이 혐오스럽다. 이러는 자신의 괴로움을 남편은 속 깊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이러는 거 싫어”
“나도 싫어. 그래도 중요한 건 놓지지 말아야지.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힘들어져.”
“나도 알아, 존. 미안한데 사람들 만나는 것도 두려워. 차라리 암이면 좋겠다. 적어도 부끄럽진 않잖아.
당신 그거 알지? 내가 나 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요양시설을 방문하여 상황을 알아본다. 하지만 거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분위기에 우울해진다. 집에 돌아온 앨리스는 인지가 더욱 떨어져서 더 이상 자기자신이 아닐 때, 판단력이 없어지고 어떤 결단을 내리지도 못할 때를 대비한다. 스스로에게 수면제를 잔뜩 복용하고 자살하도록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영상을 녹화하여 노트북 컴퓨터에 저장한다.
앨리스는 집 주소, 나이, 생일, 가족 이름, 오늘 날짜 등을 묻는 질문을 스마트폰에 입력해 놓고 수시로 답변하면서 떠나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쓴다. 그러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집 안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해 서 있는 채 오줌을 싸게 된다. 막내딸 리디아의 일기장을 우연히 들쳐 보고 그 사실을 잊은 채 태연하게 일기장 내용을 리디아에게 말한다. 리디아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연극을 관람하고도 극이 끝난 후,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인공의 연기가 감동적이었다고 말한다. 리디아는 엄마가 부끄러워할까 봐 모르는 척 그냥 고맙다고 말한다.
가족 모두 앨리스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지만 앨리스를 이해하고 깊이 공감하지는 못한다. 돌봐주고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을 뿐이다. 대학을 가지 않아 못마땅해 여기던 막내딸 리디아 만이 그녀의 어려움을 이해하려 애쓰고 소통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의 연설문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한다. 엄마에게 비밀은 없다며 자기 일기장도 앨리스가 읽게 침대 곁에 놓아두는 배려를 보인다.
앨리스는 알츠아이머협회에서 연설할 때, 잊어버리고 같은 곳을 반복할까 봐 원고의 이미 말한 부분은 노란 형광펜으로 색칠하며 얘기한다. 자신은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애쓰고 있을 뿐이며, 우리의 아이들이 다음 세대에서 이런 일을 겪지 않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이라는 내용의 연설은 청중의 감동을 자아내고 큰 박수를 받는다.
남편 존은 미네소타에 좋은 자리가 났다며 앨리스에게 같이 떠날 것을 권하지만 앨리스는 그녀의 기억이 남아있는 뉴욕을 벗어나는 것이 싫다. 안식년을 갖고 자기와 함게 일년을 보내기를 기대했던 앨리스는 새로운 곳으로 가려는 남편에게 실망한다.
“당신… 당신은 싫은 거야. 일년 동안 집에서 … 날 지켜보는 거”
“그런 말 안 했어.”
“말 안 해도 알아.”
애나는 인공수정으로 딸 아들 쌍둥이를 낳고, 온 가족이 모여 아기의 탄생을 축하한다. 탐과 애나는 각자의 생활이 있으니까 엄마를 돌보기는 어려울 테고 자기가 엄마를 데리고 미네소타에 가서 최상의 치료를 받게 할 거라고 존은 말한다. 앨리스는 자기를 배제하고 가족(리디아는 L.A.에 있어 빠졌음)이 의논하는 이야기를 쓸쓸하게 듣고 있다. 멀리 캘리포니아에 있지만 오직 리디아만이 비디오 채팅을 통해서 앨리스와 수시로 소통하며 위로하고 있다.
앨리스는 몇 달 전에 스마트 폰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고 마치 어제 그런 것처럼 생각할 만큼 인지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어느 날 리디아와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고 리디아가 보낸 포트폴리오를 메일에서 열어본다는 것을 잘못 클릭하여 전에 녹화해둔 자살 매뉴얼 영상 파일을 플레이 한다. 말없이 영상에 있는 내용을 확인한 앨리스는 욕실로 가서 물과 함께 약을 한입에 털어 넣으려는 순간, 요양보호사인 엘레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약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앨리스의 마음을 확인한 존은 L.A.에 있는 리디아를 불러온다. 리디아는 연기자로서의 좋은 기회를 포기한 채 앨리스를 돌보러 뉴욕으로 돌아오고 남편 존은 미네소타로 떠난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이 바뀌었다. 리디아는 앨리스를 공원에서 산책시키고 집에 와서 책을 읽어준다. ‘샌프란시스코행 야간비행’이라는 시를 낭송하고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 앨리스가 어눌한 말투로 대답한다.
“사랑, 사랑, 사-랑”
별이 반짝이는 건 밤하늘이 깜깜하기 때문이다. 추억 한 토막이 그토록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두워지는 기억 속에서 반짝이기 때문이 아닐까. 언니와 엄마, 그리고 세 아이를 키울 때의 추억이 반짝이는 편린으로 떠오른다. 함께 이어온 기억 하나하나가 그렇게 소중할 수 없다. 바쁘게 지낼 땐 잘 몰랐던 엄마, 언니, 가족과 함께 단란했던 뉴햄프셔 소녀 시절의 기억들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이어졌다가 끊어진다. 앨리스에게마지막까지 남은 기억은 '사랑'의 느낌이다.
구멍뚫린 기억, 새어나간 영혼 뒤에 남아 있는 건 그냥 사랑이다. 사랑!
개봉 : 2015.04.29.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국가 : 미국
러닝타임 : 101분
ㅡ 낭만천사 유광영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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