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이 없는 신념은 좀비다.

영화 - <초콜릿>

by 낭만천사 유광영

감성이 없는 신념은 좀비다.


중세 유럽의 뒷골목이 떠오르는 1950년대 프랑스 어느 시골 마을,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믿음과 윤리의식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마을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의 바탕이다. 감성의 정직함을 비틀고 위선(僞善)의 무게로 눌러 놓은 채, 소박한 이 마을에서는 중세적 권위가 아직도 품격을 누리며 행세하고 있다.


이러한 가식적(假飾的) 행위 규범은 그들에게 차가운 질서와 안정을 주었지만 대신 따뜻한 가슴을 잃었다. 이 마을의 시장을 맡고 있는 근엄한 레너드 백작, 아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캐롤린 부인, 아내를 학대하는 세지 또한 그렇다. 아니 그들 모두 그렇다. 그들의 참 행복에 봉사하지 않는 허상(虛像)의 가치관에 관습적으로 삶을 맡기고 있다.


미래의 불확실이 두려워 새장 속 편안함에 길들어진 그들은 다양성의 포용보다는 간편한 흑백논리에 익숙하다. 그들을 이끌었던 패러다임은 이제 스스로를 가두는 프레임이 되었다. 새로운 도전과 설레는 가슴은 전통과 권위에 눌려 감성이 마비된 좀비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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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질서를 깨는 것은 모두 악마의 유혹이라고 하면 그만이니 얼마나 편리한가? 골치 아프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유(思惟)의 거룩한 자유와 판단의 권리는 권위의 제단에 갖다 바쳤다. 무조건 따르기만 하는 단세포 기능만 남겨 놓았다. 책임질 일이 없으니 부담스럽지도 않다. 이것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그들의 세상이다.


이런 좀비 사회는 집단광기에 서서히 물들기 쉽다. 독일의 나찌가 그랬고, 17세기 말 미국 메사추세추 세일럼의 마녀재판이 그랬다. 인간성을 말살하고 엄청난 비극을 겪고 난 후 때늦은 한탄만 할 뿐이다. 감성이 없는 신념은 좀비다. 감성이 없는 신앙은 해골 앞의 독트린(doctrine)과 같다. 예수도 이렇게 얘기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 복음서 2,27)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워지고, 북풍이 세차면 봄이 멀지 않다. 눈보라 속에 이 마을에 도착한 떠돌이 여인 비앙과 어린 딸 아눅으로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어온다. 신비감을 앞세워 접근하는 그녀의 초콜릿을 아무도 거부하지 못한다. 새로운 매혹에 고동치는 가슴은 가식의 무게를 녹여 버리고 관념의 껍질을 부숴버릴 만큼 뜨거워진다. 마법 같은 초콜릿 향기는 감각을 지나 감성을 깨운다. 잃어버렸던 그들의 반쪽을 채워나간다. 엄한 전통과 권위 앞에서도 이렇게 이 마을의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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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은 물리쳐야 할 유혹도 아니고 싸워 이겨야 할 어두운 욕망도 아니다. 초콜릿은 좀비 사회를 멀리하는 예방주사이다. 초콜릿 맛을 본 집주인 아르망디 할머니, 죠세핀, 캐롤린 부인, 시장 레너드 백작도 심장을 타고 도는 감성의 맥박에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박제에서 깨어난 영혼이 숨을 쉰다. 인간성 존중과 감성이 살아나면서 마을은 생동감을 찾는다. 아르망디 할머니의 생일날 파티를 열어 모두 즐긴다.


죠세핀의 남편 세지는 그런 모습을 질시하여 파티를 즐겼던 집시 루의 배에 불을 지른다.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말을 듣고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살해한 스메르쟈코프와 같은 종류의 좀비 인간이다. 악마적 행위를 서슴없이 행한 자는 아주 평범하거나, 때로는 성스러운 모습을 지니기까지 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불순한 책에 접근을 막으려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수도사 호르헤가 그러하다. 그들의 공통점은 감성이 없는 좀비라는 것이다. 감성 없는 신념의 좀비는 그야말로 악마의 충실한 일꾼이다.


따뜻한 남풍이 부는 날 집시 루가 돌아와 비앙, 아녹과 함께 한다. 레너드 시장은 캐롤린 부인을 저녁에 초대하고, 강아지 찰리의 주인 벨롯과 전쟁 미망인 오델 부인이 맺어진다. 미사 시간에 신부님은 역사의 지평을 걸어갔던 우리 곁의 예수를 얘기한다. 서로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눌 때 우리의 선함이 인정받는다고 설교한다. 이제 성당 앞 광장은 모두가 즐기는 축제장이 되었다. 초콜릿의 감성이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은 떠나려던 비앙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


감성을 잠시 덮을 수는 있어도 거부할 수는 없다. 감성을 가까이하되 집착하지 않을 때, 생명의 따뜻함은 제자리를 찾는다. 심장의 더운 피를 돌리고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다. 차가운 북풍은 훈훈한 남풍으로 바뀐다. 초콜릿의 향기와 미각은 감성을 깨우는 힘이다. 사랑하는 이의 앞에 선 그대여, 초콜릿이 되어라! 감성의 맥박이 다시 뛸 것이다. 감성이 없는 신념은 좀비다.



개봉 : 2001.02.24.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국가 : 영국, 미국

러닝타임 : 121분



ㅡ 낭만천사 유광영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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