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꾸뻬씨의 행복 여행> 을 보고
헥터는 나름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이다. 템즈강이 보이는 런던 시내의 전망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건강하고, 수입은 안정적이며, 동거하는 연인은 아름답고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다. 늘 헥터를 알뜰살뜰 챙기고 깔끔하게 행동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커플이다.
“멋진 내 남자 헥터.”
“멋진 내 여자 클라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괴짜.
이런 당신이 너무 좋아. 변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헥터는 행복할까? 결혼을 미루고 아직 아이가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행복은 박물관의 유리 상자 안에 전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조건을 다 갖추었으니 관람객이 보기에 외견상 훌륭한 샘플이다. 보여주는 행복, 모범생의 행복, 타인이 인정하는 행복… 보기에 참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박제된 행복이다.
박제에 맥박이 뛰는가? 맥박이 살아있는 생물과 박제의 경계를 가르듯, 가슴 벅찬 설렘은 보여주는 행복과 실제 행복의 차이를 구분한다. 보여주는 행복은 인공지능도 만들 수 있다. 행복을 가르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은 그들이 박제 표본을 진짜 행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영화 <꾸뻬씨의 행복 여행>은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를 헥터의 체험을 통해 깨닫게 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3인칭으로 인식한다. ‘찾는 것’, ‘주는 것’, ‘받는 것’처럼 소유할 수 있거나 발견해야 하는 그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행복이 ‘나’가 아니고 내 앞에 있는 ‘너’도 아니라면 구하여야 할 대상 즉, 제‘3인칭’의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 헤맨다. 이 영화에서 헥터도 그랬다.
그러나 나는 행복을 1.5인칭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너’와 함께 나누는 관계이다. 그러니 1인칭도, 2인칭도 아니고 내가 너로 이어지는 1.5인칭이다. 너와 내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성장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 人(사람인)자가 둘이 서로 기대는 형상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렇게 행복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기 때문에 1.5인칭이다.
혼자서는 행복하기 어렵다. 외딴섬에 혼자 살았던 로빈슨 크루소가 행복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왕자처럼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많다. 적어도 행복해지려면 ‘너’와 ‘나’가 있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도 아담 혼자서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브를 창조하여 짝을 맺어 주었다. 행복은 ‘너’와 ‘나’ 사이의 1.5인칭이다.
뇌과학자에 의하면 인간의 뇌에는 다른 사람과 공감하며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변연계(limbic system)라는 구조가 있다고 한다. 인간은 타인과 연결되고 공감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우리 뇌의 한 시스템이 타인과 공유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그렇다. 그 공유된 뇌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작동한다. 혼자서는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행복은 너와 나 사이의 1.5인칭이다.
유능한 의사가 다 그렇듯이 헥터도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며 타성에 젖어 환자를 진료한다. 어느 날 그는 '안잘리'라는 환자와 상담하면서 환자의 고민을 해소하고 진정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줘야 함에도 정작 자신은 맥박 없는 박제 표본만 보여줬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정해진 루틴과 프레임 안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의문이 생기며 불안감은 그에게 근본적인 답을 요구한다. 안잘리가 내뱉은 말이 그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누가 당신을 화나게 해요?
당신 자신이네.
당신이 자신을 화나게 해요.“
경비행기를 조종하다가 조종석 뒤의 괴한에게 목이 졸리는 꿈은 불안이 꽤 오래전부터 그를 덮쳐오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헥터를 흔들어 깨우는 클라라의 손이 꿈속에서 괴한의 손으로 다가온 것은 그와 클라라와의 보이지 않는 관계를 암시한다. 클라라의 깔끔함과 지나친 보살핌이 그에게는 구속인지 모른다. 예민해진 헥터는 그의 환자들, 모형 비행기 취미 생활을 같이 하는 친구들과도 다투게 되고 점점 우울해진다. 마침내 클라라에게 털어놓는다.
“나 떠나고 싶어.
여행 갈래.
더 이상 환자들에게 도움이 안돼.
그리고… 좀 알아보고 싶어.”
“뭘?”
“행복이 무엇인지….
그래야 환자를 돕지.
꼭 사기꾼이 된 기분이야.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뻔한 충고나 팔아먹고 사는….”
마침내 헥터는 행복의 맥박을 찾아 취재기자처럼 여행을 떠난다. 헥터는 중국 샹하이, 티벳, 아프리카, 미국 L.A.를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행복의 의미에 대해 묻고 깨달은 바를 노트에 하나씩 적어나간다. 마치 그 노트을 꽉 채우고 나면 행복을 알게 될 것처럼….
중국 샹하이로 가는 비행기에서 헥터는 우연히 돈 많은 은행가 에드워드와 가까워진다. 에드워드는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면서 헥터를 화려하고 흥미로운 거리, 럭셔리한 레스토랑, 환락가의 유흥 클럽으로 데리고 간다. 많은 볼거리와 최고급 요리를 맛보게 한다. 클럽에서 젊음의 열기, 자극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헥토는 아름다운 여자들과 술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에드워드는 웃으며 말한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웃기는 소리”
헥터는 매력적인 여인 잉리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함께 행복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잉리와 함께 점심을 하는 도중 그녀는 돈이 목적인 유흥가 여자일 뿐임을 알게 되고 허탈해한다. 돈에 의해 유지되는 쾌락과 행복은 잠시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 더 큰 공허감에 빠지게 됨을 깨닫는다.
헥터는 티벳으로 발길을 돌린다. 사원의 스님으로부터 단순한 삶에서 오는 깊은 평온을 느낀다. 스님으로부터 “불행을 피하는 게 행복의 길은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샹하이로 돌아온 헥터는 에드워드와 작별하고 오랜 친구 마이클이 의사로 봉사하고 있는 아프리카 오지로 떠난다. 그곳에서 테러와 빈곤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도 서로 돕고, 나누고, 기쁨을 잃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공동체의 따뜻함을 경험한다.
그곳 사람들은 힘든 삶 속에서도 웃을 줄 안다. 고구마 스튜 하나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다. 헥터보다 가진 게 없지만, 그들은 서로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의 행복은 1.5인칭에서 나온다. 열악한 환경에서 현지인들을 위해 진료하는 마이클은 헥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행복해 보인다면 그건 내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 때문일 거야.”
'디에고 바레스코'는 마약을 재배하고 거래하는 조직의 우두머리이다. 헥터는 그를 경멸하지만 그의 아내가 정신과 치료로 고통받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치료를 도와준다. 메모를 하기 위해 우연히 디에고 바레스코의 펜을 빌리게 된 헥터. 이 펜이 그의 목숨을 구해줄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세상의 가장 중요한 일은 이렇게 내가 모르는 가운데 진행된다. 알려고 하지 말아라. 알았더라도 아는 척하지 말아라. 맥박은 아는 척하지 않을 때 더 잘 뛰고 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댓가가 없더라도 아낌없이 도와주어라. 디에고 바레스코의 펜과 같이 나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
지역 갱단에게 붙잡혀 죽을 처지에 놓인 헥터는 모든 걸 다 내려놓는다. 그러자 혐오스러워했던 생쥐에게도 연민을 느끼고 여행용 캔디를 나눠 준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지난 세월의 일들이 압축되어 그의 뇌리를 스친다. 그러다가 그는 클라라를 애타게 부른다. 행복의 핵심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이다. 1.5인칭이다. 메모를 하는 헥터의 펜에 새겨진 이름 “디에고 바레스코”를 확인한 갱단 두목은 안색이 변하더니 그를 풀어준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헥터가 마을로 달려가 외친다.
“나 살아 있어요. I’m Alive!”
마을 사람들은 모두 뛰쳐나와 기뻐서 환호를 지르며 헥터를 얼싸안고 춤을 춘다. 그들 사이는 이미 1.5인칭이다. 맥박 뛰는 행복이다. 춤출 줄 몰라도, 춤을 좋아하지 않아도 헥터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사람들과 정신없이 춤춘다. 춤은 생명의 율동이다. 이렇게 헥터의 아프리카 여행은 지울 수 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헥터는 L.A.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뇌에 종양을 앓고 있는 자밀라의 고통을 덜어준다. 비행기가 안전하게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용기를 준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자밀라는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헥터에게 감동한다.
“전 겁 안나요, 헥터.
죽음을 겁내는 사람이 삶도 겁내죠.
당신은 훌륭한 의사에요.
그 성품 말이에요.
귀 기울여 주는 것이 사랑이죠.”
헥터는 L.A.에서 뇌과학자이며 베스트 셀러 『행복은 부수적인 효과다(Side effects may include happiness 』의 저자인 코먼 교수의 강연을 듣는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우리 중에 몇이나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까?
순수한 그 기쁨의 순간들을….”
강연 후 헥터는 옛 여자 친구였던 아그네스와 함께 코먼 교수의 감정 측정 실험에 참여한다. 헥터는 실험 부스에 들어가 뇌파 측정 장치를 머리에 쓰고 클라라와 결혼식을 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클라라로부터 전화가 온다. 클라라는 아기를 갖고 싶다며 울먹인다. 자세한 설명없이 여행을 떠나 미안하다고 클라라에게 사과하는 순간 헥터는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흐느낀다..
“클라라, 내 가장 큰 불행은 당신을 잃는 거야.
내 가장 큰 행복은 당신과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헥터와 클라라는 동시에 서로를 부르며 계속 울먹인다.
“나의 헥터가 보고 싶어.”
“나의 클라라가 보고 싶어.”
“맞아 중요한 건 우리지.
당신과 나.”
“그래.”
“사랑해.”
“나도 사랑해.”
헥터는 하염없이 흐느끼며 지난 일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클라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떠올린다. 밖에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던 코먼 교수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옆에 있던 아그네스가 코먼에게 묻는다.
“이건 어떤 감정이죠?”
“모든 것 다요?”
행복은 단일 감정이 아니라 연결된 감정의 복합체이다. 사랑, 감동, 고통을 견딘 후의 해방감, 안전, 연결감, 성장 이 모든 감정이 함께 움직일 때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경험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티벳의 오색 깃발 룽다와 타르초처럼 다양한 색깔로 나타난다.
사랑은 완벽한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상대와 성장하는 과정이다. 행복은 완벽한 순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그 순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1.5인칭이 되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는 능력, 타인과 연결되는 감정, 두려움을 극복한 진짜 관계, 사랑을 표현하는 용기가 그렇게 만든다.
실험 부스에서 나온 헥타는 아그네스에게 부탁한다.
“나 공항에 좀 데려다 줄래?”
런던으로 돌아온 헥터가 클라라와 늘 새로우면서도 알콩달콩 지내는 장면을 배경으로 나레이션이 전개된다.
“그의 세계는 복잡했고, 때론 뒤죽박죽이었죠.
그는 그런 삶이 좋았어요.
틀에 박히지 않는 삶이 이젠 되려 편했죠.”
“그는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헥터는 클라라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로써 그들 관계는 공식 서류상에 1.5인칭으로 등기되었다. 헥터가 여행을 통해 깨달은 통찰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단, 박제된 상태가 아닌 뛰는 맥박과 함께 느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만나는 그 누군가와도 1.5인칭으로 대하자. 행복은 1.5인칭이다.
* 헥터의 노트에 적힌 행복에 관한 15가지 깨달음
1. 남과 비교하는 것은 당신의 행복을 망칠 수 있다.
Making companions can spoil your happiness.
2. 많은 사람은 돈이나 지위를 갖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A lot of people think happiness means being richer or more important.
3. 많은 사람은 행복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Many people only see Happiness in their future.
4.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자유가 행복일지도 모른다.
Happiness could be the freedom to love more than one woman at the same time.
5. 때론 진실을 모르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Sometimes happiness is not knowing the whole story.
6. 불행을 피하는 게 행복의 길은 아니다.
Avoiding unhappiness is not the road to happiness.
7. 상대가 날 끌어올려 줄 사람인가 끌어내릴 사람인가?
Does this person bring you predominantly up or down?
8. 행복은 소명에 응답하는 것.
Happiness is answering your calling.
9. 행복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것.
Happiness is being loved for who you are.
10. 고구마 스튜 만세
Sweet potato stew!
* 마을 주민들이 고구마 스튜 하나 가지고도 행복할 수 있음을 나타낸 말
11. 두려움은 행복을 가로막는다.
Fear is an impediment to happiness.
12. 행복이란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Happiness is feeling completely alive.
13. 행복은 좋은 일을 축하할 줄 아는 것.
Happiness is knowing how to celebrate.
14. 사랑은 귀 기울여 주는 것.
Listening is loving.
15. 향수에 젖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Nostalgia is not what it used to be.
러닝 타임: 120분
제작: 2014년, 영국
장르 : 모험, 드라마
감독: 피터 첼섬
- 낭만천사 유광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