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자전거 탄 소년>을 보고
수묵화에서 여백은 비어 있는 듯하면서도 깊이와 의미를 채운 공간이다. 안개와 구름, 물과 나무, 능선과 하늘이 끊어진 듯 이어진다. 비어 있는데 뭔가 꽉 찬 것 같고, 꽉 찬 듯한데 여백으로 남는 여유로움이 선불교(禪佛敎)의 공 사상(空思想)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주로 선승(禪僧)들이 많이 그렸다고 한다. 수묵화의 여백은 비어 있으면서도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공간이다.
영화 <자전거 탄 소년>에서 시릴의 절제된 침묵은 수묵화의 여백처럼 무표정함 속에 고독감과 분노를 담고 있다. 정작 시릴은 울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눈물을 자아낸다. 드러나지 않은 슬픔과 분노가 ‘여백의 미’처럼 침묵 속에 배어있다. 그 침묵의 무게가 아픔의 저울추를 누른다. 그리고 '여백의 미'는 아픔을 씻어낸다
보육원에 맡겨진 시릴은 아버지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이미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는 사실을 여러 사람이 말해줘도 눈으로 확인하기까지는 믿을 수 없다. 어느 날 기회를 틈타 드디어 보육원을 빠져나간다. 닿지 못할 이상을 향해 쳇바퀴 돌리는 우리 삶처럼 시릴의 애착은 한 방향뿐이다.
보육원 상담교사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병원으로 도망친 시릴은 퍼플색 옷을 입은 사만다를 꽉 붙잡고 안 떨어진다. 갓난아이 때부터 작동되는 모로반사, 존재의 위협 앞에 퇴행된 절박한 자기보호 본능이다. 이때 사만다가 보인 반응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만다는 시릴을 거부하지 않는다. 조용히 타협한다.
“그렇게 세게 말고…. 아프잖니.
잡아도 되는데 너무 세게 잡지마.”
“어서 놔드려. 함께 가자.”
“아빠 집에 있을 거야.”
“이사 갔다니까.”
“내 자전거도 거기 있어.”
“아파트를 보여줄게요.”
아파트 관리인과 보육원 상담교사는 시릴이 살던 아파트로 데리고 간다. 텅 비어 있는 아파트…. 믿었던 꿈이 무너져 내린다. 말없이 돌아온 시릴은 보육원 침대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다. 토요일 아침에 침대에서 꼼짝 않던 시릴은 사만다가 자전거를 가져왔다는 말에 벌떡 일어난다. 시릴에게 자전거는 늘 그와 함께한 정체성의 상징이다.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자유, 그리고 희망이다.
사만다가 돈을 주고 자전거를 되찾아 주는 장면이 앞으로의 이야기를 예고하듯 의미 있게 다가온다. 사라졌던 꿈 하나가 되돌아와 시릴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시릴은 자전거를 되찾았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뿐 감사의 말을 하지 않는다. 아직 누군가의 ‘호의’를 신뢰할 수 없다. 어른들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시릴은 사만다 앞에서 익숙한 솜씨로 묘기를 부리며 자전거와의 일체감을 보여준다. 사만다에게 호감을 느낀 시릴은 사만다에게 묻는다.
“주말에 함께 있어도 돼요?”
“원장님께 물어봐야 돼.”
“허락하실걸요. 후견 가정이 필요하니까. 물어보세요.”
“아니, 이미 출근이 늦었어.
전화해볼게, 안녕.”
“말만 그렇지, 안 할 거잖아요.”
“할 거야. 안녕.”
시릴은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을 찾은 것처럼, 출발하는 사만다의 자동차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사만다는 시릴의 후견인이 되고 핸드폰도 사준다. 시릴은 사만다 집에 머무는 주말에 동네를 돌면서 아빠가 다녔던 상점마다 찾아가 아빠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러던 중 자신의 자전거를 아빠가 팔겠다고 한 광고문을 주유소 유리창에서 목격한다. 아빠와의 연결 고리이자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자전거를 아빠가 팔아버렸았다는 사실에 시릴은 절망과 분노를 안고 돌아선다.
감정을 흘려버리려는 듯 시릴은 수도꼭지를 계속 열어 놓은 채 세면대 안에서 손을 적시고 있다. 사만다가 수도꼭지를 잠그자 시릴은 거세게 뿌리친다. 시릴의 자전거를 샀다는 사람과 통화해봤지만 이사 간 아빠의 주소를 알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휴일, 놀이동산에서 시릴은 사만다와 놀이기구를 타고 싶어 한다. 무서워서 못 타니까 사만다가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타라고 한다. 시릴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도망친다. 사만다를 제외한 다른 어른을 모두 불신하는 시릴. 그날 밤 시릴은 몰래 사만다의 침실을 들여다보다가 그녀가 남자친구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홱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뛰어간다. 사만다가 시릴이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간다.
“앉아도 되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사만다가 껴안듯 등을 어루만진다.
“따뜻하다.”
“뭐가?”
“아줌마 입김.”
생명에 용기를 주는 것은 따뜻한 입김이다. 하느님도 흙으로 아담을 빚어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었다. 시릴에게 사만다의 입김은 생명의 용기이다.
사만다와 보육원장은 경찰을 통해서 시릴 아빠의 새 주소를 알아낸다. 사만다는 시릴을 데리고 그의 아빠를 찾아간다.
“네가 꿈꾼 거랑 달라도 화내지는 마”
“난 꿈 안 꿔요.”
아빠를 만나러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사만다와 물병을 가지고 서로 장난치는 장면은 시릴이 이 영화 중 유일하게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릴의 변화가 시작됨을 나타낸다. 기분 좋아하는 시릴을 흐뭇하게 곁눈으로 바라보는 사만다. 가벼운 장난이지만 이들 사이에 이루어진 신뢰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 같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40분이 지나도록 아빠가 나타나지 않자 시릴과 사만다는 주소로 그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에서 시릴은 걷기보다는 대부분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버지와 자전거를 향한 그의 조급하고 간절한 마음이 드러난다. 우여곡절 끝에 아빠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가서 시릴은 아빠를 만난다.
“아줌마 좋은 분이냐?”
“착하셔. 내 자전거를 되사주셨어.”
“잘됐다. 팔아야만 했어. 아주 곤란했거든.”
“괜찮아.”
“나 언제 데려 갈거야? 한 달만 있으랬잖아.”
“전화하고 싶었지만 가보지도 못하는데 뭐 하러….”
“괜찮아.”
“널 못 데려와. 알지?”
“그럼 언제 또 만나?”
“전화할게.”
“통화가 안 되면 내가 아빠한테 다시 올게.”
자전거를 팔아버렸다는 사실을 시릴에게 덤덤히 말하는 장면은 참 잔인하게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릴의 존재 자체가 아버지의 삶에서 이미 정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릴이 아빠에게 괜찮다고 위로하는 순간에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하는가? 이기적인 시릴 아빠의 태도에 분노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시릴의 모습에 가슴이 저며온다. 저 아이의 작은 가슴이 그렇게 넓었던가? 아니다 감당 못하는 슬픔의 무게가 아픔과 분노를 마비시켰을 것이다. 마비된 감성은 영혼을 병들게 한다.
아빠는 시릴에게는 토요일에 전화하겠다고 해놓고는 사만다를 따로 불러서 시릴을 보는 게 스트레스니 앞으로 시릴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이 좀 돌봐주세요.”
“쟨 내가 아니라 아빠를 원해요.”
“날 잊게 될 거예요. 새 출발을 할 거예요. 쟤가 곁에 있으면 일을 할 수 없어요.”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할 텐데요.”
“다시는 만나기 싫어요. 못 만난다고 얘기해줘요.”
아빠가 시릴에게 토요일에 전화하겠다고 거짓 약속을 한 것을 알게 된 사만다는 직접 얘기하라고 하며 시릴을 그의 아빠 앞으로 데려간다.
“다시는 찾아 오지마. 보육원이나 아줌마랑 있어. 괜찮을 거야.”
“전화 안 할 거야?”
“안 할 거야.”
아빠는 결국 본심을 드러내며 문을 닫고 돌아선다. 시릴은 그렇게도 피하고 싶었던 순간을 직면한 채 굳게 닫힌 문 앞에 망연자실 서 있다. 엄청난 상실감이 시릴의 존재의식을 허물고 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미는 사만다의 손길도 거세게 뿌리친다. 시릴은 스스로 얼굴을 할퀴고 머리를 자동차 문에 계속 짓이긴다. 그러다가 말리는 사만다의 품에 안겨 흐느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시릴을 사만다가 말없이 꼭 껴안는다. 한참 동안 시릴을 안아 주다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괜찮아.”
버림받았다는 슬픔과 분노는 시릴이 견뎌내기에 너무 벅차다. 사만다의 따뜻한 품이 없었다면 시릴은 고통스럽게 무너졌을 것이다. 아빠는 시릴을 사랑하지 않아서 버렸을까? 그는 나쁜 아빠일까? 단순히 책임질 능력도, 의지도 없는 무능한 어른일까? 쉽게 말할 수 없다. 그 전후 사정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을 상세히 알고 나면 그에게 측은지심이 들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어린 시릴의 영혼이 지금 견디기 힘든 아픔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과(因果)의 투명함 속에 아빠가 서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좌우가 대칭일 때 굴러간다. 시릴과 그의 아빠는 어쩌면 거대한 사회 부조리의 퍼즐 조각 하나를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릴은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는 소년을 쫓아가서 싸우다가 그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스티브를 만난다. 스티브는 시릴의 용기와 끈질김을 인정해주고 집에 데리고 가서 게임도 하며 같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펑크 난 시릴의 자전거 수리비도 대신 내준다.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주고 신뢰해준 스티브에게 시릴은 호감을 갖는다. 스티브는 시릴에게 같이 할 일이 있다고 하며 교묘히 그를 범죄에 끌어들인다.
외출한 시릴과 연락이 되지 않자 사만다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찾아 나선다. 시릴을 찾아 함께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사만다는 남자친구가 왜 핸드폰을 받지 않았느냐고 하며 시릴에게 강제로 사과를 요구하자 그와 크게 다툰다. 자기와 시릴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남자친구의 다그침에 사만다는 “시릴”이라고 말한다. 뒷좌석에서 시릴이 말없이 지켜본다.
사만다는 불량한 스티브를 만나지 말라고 했지만 상실감을 채워주고 도움을 주었던 그를 시릴은 모른척 할 수 없었다. 결국 그의 꾐에 빠져 강도를 모의한다. 밤에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는 사만다를 포크로 찌르고 시릴이 뛰쳐나간다. 사만다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감에 한참 울먹인다. 시릴은 스티브의 지시에 따라 밤에 퇴근하는 신문 판매점 주인을 야구방망이로 내리치고 돈을 빼앗아 달아난다. 사실 시릴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고립감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
범행 후에 스티브에게도 버림받고 혼자 길거리에 내쳐진 시릴은 야간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아빠에게 간다. 훔친 돈이지만 경찰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며 아빠에게 내민다. 끝까지 아빠와의 연결 고리를 이어 보려는 시릴의 간절함은 보는 이의 가슴을 안쓰럽게 한다. 아빠는 범죄자가 되기 싫다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매정하게 돌아선다. 시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롭게 밤거리를 자전거로 달린다. 늦은 밤, 꽤 긴 시간 동안 바람을 가르며 홀로 달리는 장면. 깊은 고독과 분노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사만다, 팔을 다치게 해서 미안해요. 아줌마랑 살고 싶어요. 항상”
“알았어. 키스해줘.”
마주 보며 사만다는 시릴의 어깨와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로 신뢰와 애정이 발아(發芽)되는 순간이다. 사만다는 시릴을 한 인격체로 존중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았다. 곁에 있어 주었다. 지켜봐 주었다. 씨앗이 싹틀 때의 환경처럼, 아주 단순하게 그저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얼어붙은 시릴의 감성을 발아(發芽)시킨 것은 사만다의 조건 없는 포용이었다.
경찰서에 가서 신문 판매상의 금전적 피해와 병원비를 보상하고 서로 화해했다. 공범 스티브는 수감되었다. 사건이 처리되고 시릴과 사만다가 자전거 타고 나들이 간다. 평화로운 운하의 물살을 따라 달리다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함께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은 연인 사이처럼 다정하게 보인다.
바비큐용 숯을 들고 돌아 오는 길에 시릴은 신문 판매상 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쫒긴다. 나무 위로 도망쳤다가 판매상의 아들이 던진 돌에 맞아 나무 위에서 떨어진다. 쓰러져 아무 기척이 없자, 시릴이 죽은 줄 알고 당황하던 신문 판매상 부자가 119에 신고하려 한다. 그 순간 쓰러졌던 시릴이 다시 일어나 숯을 한 손에 들고 자전거에 올라 타 거리를 가로지르며 사만다에게 돌아간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
시릴은 부활하였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사과받기를 거부하던 신문 판매상 아들에게 진 빚도 갚은 셈이다. 더 이상 아빠를 그리워하지도 않는다. 더 이상 갈 곳을 망설이지도 않는다. 시릴에게는 자전거가 있고, 사만다가 있다. 사만다와 함께하며 더 이상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어도 된다. 시릴은 부활하였다. 시릴이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세례 의식이다. 열린 결말이지만 희망을 보여준다. 잠시 기절이란 통과의례는 과거와 작별하기 위한 위자료다.
〈자전거 탄 소년〉은 극적인 사건보다도 인물의 행동과 침묵, 반복을 통해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변화의 순간에서도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듯 무표정하게 굳은 시릴의 침묵은 안개처럼 서서히 우리를 연민의 정으로 둘러싼다. 시릴의 자전거는 아버지, 자유, 정체성, 그리고 희망을 상징하며, 끝없이 굴러가는 우리 삶을 의미한다. 영화는 이 자전거를 중심으로 시릴의 행동과 관계의 변화를 따라간다.
사만다의 인내심과 조건 없는 관심은 구원의 가능성이 어디에서 싹트는지 조용히 알려준다. 그녀의 그런 심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쩌면 마음 깊이 내면에 관심이 필요한 사람은 사만다인지도 모른다. 인연의 수레바퀴는 앞뒤가 한방향일 때 굴러간다. 시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까? 시릴을 떠맡도록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순간을 차고 들어온 시릴의 침묵이었는지 모른다. 절제된 침묵이 아픔의 무게를 더했다.
러닝 타임: 87분
제작: 벨기에, 프랑스
장르 : 드라마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 낭만천사 유광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