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복제되지 않는다. 늘 새롭게 창조될 뿐이다.

영화 <모니리자 스마일>을 보고

by 낭만천사 유광영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 사회는 강력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든다. 전쟁에 동원되었던 남성들을 대신하여 군수 공장과 사무직, 연구직 등 다양한 영역에 진출했던 여성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는다. 여성은 가정의 중심이자 도덕적 수호자로서, 다음 세대 올바른 미국 시민을 양육해야 하는 과제를 떠맡는다. 대학 교육조차도 개인의 전문성과 가능성을 확장하기보다 결혼과 가정을 우선 목표로 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모나리자 스마일〉은 전후 미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처했던 구조적 억압과 그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문제를 통하여 행복 및 자아실현의 의미를 탐구한다. ‘이상적 여성상’의 형성, 냉전과 가정 이데올로기, 엘리트 여성 교육의 모순 속에서 여성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보다 ‘누가 선택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냉전이 본격화되던 시대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는 매카시즘과 같은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찰리 채플린과 같은 영화감독도 FBI에 의해 미국에서 추방될 정도다. 이 같은 유령의 그림자는 일상의 가치관에도 깊숙이 스며든다. 미국 사회는 ‘안정적인 핵가족’을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내세웠고, 가정은 국가 이념을 수호하는 최소 단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사회적 압력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은 형식적 자유에 불과하다. 이러한 시대의 부조리는 나중에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반전운동으로 68혁명을 점화시켰다.


1953년 가을, 매사추세츠 웰슬리 캠퍼스에 새로운 미술사 교수가 부임한다. 캐서린은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기존 웰슬리 교수진과는 다른 배경과 가치관을 지녔다. 웰슬리의 학생들은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착한 딸, 완벽한 아내, 교양 있는 여성을 추구하는 교육으로, 그들의 자아실현과 잠재력이 제한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결혼한 학생에게는 수업 결석이 묵인될 정도로 오직 ‘미래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는데 중심을 둔다. 개인의 진짜 욕구와 행복의 추구는 억압되는 분위기다. 아만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피임을 권장했다가 문란한 성생활을 조장했다는 이유를 들어 해고된다.



캐서린이 웰슬리에 오길 원했던 것은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업 전 학생들은 이미 교재를 암기하고 있어 미술 작품의 연도, 양식, 작가를 정확히 답변한다. 그러나 캐서린은 이 준비된 답변을 칭찬하기보다 작품에 대한 개인적 판단과 해석을 요구한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학생들은 혼란에 빠진다.


“이것이 정말 예술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질문은 학생들의 삶을 향해 있다. 그들에게 정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은 불안을 동반한다. 모범 답안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캐서린의 수업은 지적 도전 이전에 질서에 대한 위협이다. 특히 베티에게 캐서린은 불편한 존재다. 베티는 명문 가문 출신으로 전통적 규범을 신념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그 규범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해왔다. 그 규범이 흔들린다면, 그녀의 삶 전체가 불안정해진다.


“예술일까?”
“사진이잖아요.”
“유명한 작가가 찍은 사진이라면?”
“예술로 인정받기 전엔 아네요.”
“공인을 받아야죠.”
“누구한테?”


“다시 한번 잘 봐. 좀 더 깊이 있게.

새로운 사고에 마음을 열어봐.”

“선택은 너희에게 달렸어.

남들이 좋다는 걸 베끼며 살든가 아니면…”


캐서린은 ‘이미 정해진 기준’을 얼마나 잘 습득하는지가 아니라 개인의 해석과 판단, 가치 선택을 요구한다. 교재에 없는 작품을 제시하며 질문한다. “이것이 예술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미술사 논쟁이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를 뒤흔든다. 학생들은 당황한다.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캐서린은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교수법의 차원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다. 행복은 정답으로 복제되지 않는다. 오직 새롭게 창조될 뿐이다.


캐서린에게 교육은 정답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판단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다. 그녀는 학생들이 미술 작품을 ‘옳게 이해했는지’보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를 말하도록 요구한다. 정답 중심 교육은 안정적이지만, 질문 중심 교육은 불안정하다.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깨닫는 교육의 본질이다. 질문하지 않는 교육은 사회에 적응한 인간을 만들 수는 있어도, 스스로 선택하는 인간을 만들지는 못한다.


캐서린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며 정형화된 그들의 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작품과 사물에 대한 개인의 해석을 요구한다. 우리는 정말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선택했다고 믿는 그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감내하고 있는가? 이러한 캐서린의 교육 철학은 학교 측과 충돌한다. 대학은 캐서린의 방식이 학생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문제 삼으며, 그녀에게 순응을 요구한다.


“당신 수업방식에 대해 말이 많아요.

웰슬리의 전통과는 안 맞는다고 할까.

우린 전통을 중요시해요. 여기 계속 남고 싶다면….”


총장은 사회 변화를 이끄는 대학의 역할을 스스로 부정한다. 캐서린이 학생들에게 요구한 개인적 선택과 비판적 사고는 곧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체제 불안 요소이다. 캐서린은 체제의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베티는 이러한 학교 체제의 가치관을 내면화한 인물로서, 전통적 여성상이 곧 자신의 정체성이다. 베티에게 규범은 억압이 아니라 보호 장치다. 규범을 따르는 한, 그녀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안전하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온 모든 확신이 불안해진다. 그녀는 캐서린의 방식이 “혼란을 조장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이란 전통을 무시하지 마세요.”
“결혼했다고 수업을 무시하지 마.

출석 확실히 해. 안 그러면 낙제야.”


베티는 캐서린을 비난하는 사설을 학교 신문에 기고하며, 공개적으로 대립한다.


“결혼한 웰슬리 학생은 능숙하게 살림과 공부를 병행해왔다.

이제 여성 해방을 외칠 땐 지났다.

진정 여성이 해야 할 일은 가정을 굳건히 지키며

전통을 계승할 아이를 낳는 것.

왜 미술사 교수인 미스 왓슨이 신성한 결혼에 반기를 드는가?

그녀의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은 여성의 타고난 역할을 위협한다.”


베티의 사설을 읽고 난 캐서린은 학생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총장과 의견 충돌을 갖는다. 총장과 언쟁을 벌인 후, 답답해진 캐서린은 이태리어 교수 빌을 찾아가 한탄하지만 영악한 현실주의자인 그로부터 별 위안을 받지 못한다.


“정말 교묘해. 완벽한 음모야.

대학을 가장한 신부학교잖아.”

“뭘 바랐소?”

“그 이상!

미래의 지도자를 배출하는 곳!
그들의 부인이 아니라!”


캐서린은 ‘아담의 갈비뼈’라는 학생들의 비밀 모임에서 초대되어 첫사랑과 같은 개인적인 일들을 털어놓는다. 캐서린을 못마땅해하는 베티는 비꼬는 투로 말을 건넨다.


“선생님은 관습에 안 매이시나 봐요?”
“별로,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기혼자는 무례해도 괜찮은지 모르지만.”

베티는 축복 속에 결혼하였으나 남편의 태도는 그녀의 기대와 다르고 가정은 또 다른 압박과 불안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완벽한 아내가 되기 위해 불만과 의심을 억누른다. 베티는 쉽게 이 상황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혼은 실패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선택이 얼마나 사회적 압력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묻게 한다. 선택의 자유는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다. 행복은 시스템으로 복제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롭게 창조될 뿐이다.


반면 조앤의 결혼은 외부의 기대와 함께 그녀 자신의 의미 있는 선택이다. 조앤은 예일대 로스쿨 입학이 허가되었음에도 스스로 결혼을 선택한다. 이 대비는 결혼의 문제를 제도 자체보다 개인의 위치와 조건에서 바라보게 한다. 결혼은 어떤 인물에게는 압력이지만, 다른 인물에게는 자유로운 선택이다. 문제는 결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로 강요될 때이다.


그러나 캐서린은 조앤의 선택을 ‘가능성의 포기’로 해석한다. 조앤의 선택 앞에서 캐서린이 느끼는 실망은 그녀 역시 자신 또한 특정 삶의 모델을 이상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 아내와 엄마가 되는게 더 좋아요.

어리석은 선택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아냐.”
“선생님은 늘 그런 식이어요.

고정관념을 깨라고 하시면서 선생님은 못 깨잖아요.

가정주부를 속물적인 백치로 보시죠.
속에 든 것도 없고, 지성도, 흥미도 없는.

원하는 걸 하라고 격려한 건 선생님이어요.

전 이걸 원해요.”


조앤은 캐서린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이 타인의 기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임을 분명히 한다. 자유란 특정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지는 결정 과정임을 강조한다.


코니는 전통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며 안정과 소속감을 얻는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고, 이는 거짓된 감정이 아니다. 자유와 만족은 반드시 같은 방향을 향하는가? 우리는 더 많은 선택지를 가졌지만, 그 선택이 항상 더 큰 만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캐서린의 방식을 흥미롭게 여기지만, 자신의 삶을 바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극적인 성격이지만 찰리와의 사랑을 위해 찰리의 기숙사로 쳐들어가는 용기를 보인다.


지젤은 학교 규범을 가장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남자 교수와의 잠자리도 서슴지 않을 만큼 성적 자유와 개인적 독립을 중시한다. 타인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다른 삶이 실제로 존재함을 몸으로 보여준다. 지젤은 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그 자유는 언제나 사회적 비용을 치르게 마련이다. 지젤의 존재는 학생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결혼 후 남편 스펜서와 관계가 멀어진 베티는 이런 지젤을 천박스럽게 여기면서도 속으로는 그 자유를 부러워한다. 지젤은 스펜서가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것을 알고 베티에게 연민을 느낀다. 나중에 결국 베티는 이혼한 후에 그녀가 창녀라고 경멸했던 지젤과 함께 뉴욕에서 살기로 한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 하다. 함부로 남을 비난할 일이 아니다.


‘모나리자 스마일’은 기쁨인지, 슬픔인지, 냉소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미소는 단일한 감정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복합적 감정, ‘모나리자 스마일’은 이러한 모호함을 집약한다. 웰슬리의 학생들은 ‘완벽한 여성’의 미소를 띠고 있지만, 사회적 요구에 순응한 얼굴이다. 그러나 질문하는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이 여성들의 삶 또한 단일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영화의 제목은 강력한 은유로 작동한다.


캐서린의 수업방식은 점점 문제시된다. 학교 측과 동문회에서는 그녀의 교육이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준다고 판단한다. 그녀는 기존 커리큘럼을 따르고, 학생들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도록 강요받는다. 여기에서 제도의 본질이 드러낸다. 제도는 관리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변화를 허용할 뿐이다. 이것은 도전과 모험이 아니라 또 다른 정답의 강요이다. 캐서린은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이는 자신의 교육 철학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은 정답으로 복제되지 않는다. 늘 새롭게 창조될 뿐이다.


영화에서 미술 작품들은 삶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전통적 미술과 현대 미술은 곧 규범적 삶과 실험적 삶의 대비로 읽힌다. 캐서린의 수업에서 제시되는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논쟁적이다. 전통적 미술사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품들, 상업 디자인, 현대 미술은 종종 불편하고 난해하다. 학생들은 이를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캐서린은 작품이 ‘아름다운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고를 촉발하는가이다.


학생들이 느끼는 불편함은 기존 가치 체계가 흔들릴 때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이다. 그러나 그런 불쾌함과 혼란은 새로운 사고의 출발점이다. ‘모나리자 스마일’처럼, 예술은 단일한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예술을 하나의 정답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이 영화는 이를 통해 삶 또한 해석의 대상임을 강조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남긴다.


“당신의 선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영화〈모나리자 스마일〉이 단순한 페미니즘이나 교육 영화를 넘어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선택, 교육의 책임, 사회 구조의 폭력성이 드러나며 실존주의적 깨우침을 전한다. 마지막 수업에 학생들이 각자 고흐의 꽃 그림을 그려서 들고 들어오는 장면은 캐서린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베티는 결국 이혼을 결심하며, 처음으로 어머니와 사회의 기대에 반기를 든다. 베티의 결혼 생활이 무너지는 과정은 그녀의 내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베티는 여전히 두려워하며, 사회적 낙인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불행을 인정한다. 베티의 변화는 조용한 용기에서 시작되었다.


“행복해 보이면 그걸로 된 건가?”
“제발 집안 망신시키지 마.”

“잘 들어요, 엄마. 보여지는 게 다 진실은 아냐.”


학교 측의 순응적 재임용 조건을 거부한 캐서린은 웰슬리를 떠난다. 제도는 바뀌지 않았고, 학교는 그대로 유지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그녀를 따라오는 모습은 또 다른 가능성을 암시한다. 변화는 고정된 사고방식의 균열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변화가 한 개인의 영웅적 성취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파동임을 암시한다. 변화는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자각의 순간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행복은 반복적 암기로 복제되지 않는다. 언제나 새롭게 창조될 뿐이다.


캐서린이 기대를 걸었던 조앤은 평범한 주부가 되는 길을 택하고, 전통적 가치관의 화신이었던 베티가 이혼 후 로스쿨 진학을 고려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깨달음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정돵화한다. 선택의 주체가 본인 스스로라면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베티는 캐서린을 만나 화해하고 가끔 찾아뵙겠다고 하지만, 캐서린은 웰슬리를 떠난다. 베티는 학교 신문의 마지막 사설에 캐서린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그녀가 떠나는 사실에 아쉬움을 담았다.


“나의 선생님 캐서린 왓슨은 자신의 길을 고집하며

웰슬리와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난 이 마지막 사설을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던 아주 특별한 여성에게 바친다.

그녀는 목표 잃은 방랑자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녀는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이미지에 가려진 진실의 빛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


캐서린의 실패는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구조적 한계를 상징한다. 그녀는 일부 학생들에게 변화를 일으키지만, 제도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결말이 다소 씁쓸하지만, 동시에 현실적이다. 변화는 한 개인의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을 강조한다. 웰슬리 칼리지는 이러한 사회 구조가 집약된 공간이다. 영화는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 실존적 개인과 제도의 충돌, 자유와 규범의 갈등을 드러낸다.


“당신의 선택은 정말로 당신의 것인가?”


변화는 제도를 뒤엎는 혁명이 아니라, 인식의 균열이다. 질문은 당장 삶을 바꾸지 않지만, 방향을 바꿀 가능성을 남긴다. <모나리자 스마일〉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정말로 당신의 것이었는가? 우리 역시 선택의 자유를 말하면서, 동시에 선택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는 사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모나리자 스마일〉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행복은 복제되지 않는다. 늘 새롭게 창조될 뿐이다.



장르 : 드라마

감독 : 마이크 뉴웰

출연 : 줄리아 로버츠, 커스틴 던스트 등

개봉 : 2003년 12월 19일

러닝타임 : 119분



- 낭만천사 유광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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