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에는 예년에 비해 눈이 자주 내렸다. 신문 방송에서는 폭설이라고 호들갑을 떨 만큼 많이 쌓인 적도 있다. 하루는 저녁 때 하늘에서 땅에 은빛 세례를 베풀더니 순식간에 온 세상을 하얗게 개종시켰다. 예측 못한 급작스런 눈이라 미처 제설작업이 뒤따르지 못해 버스운행이 잠시 중단되었다. 차가 멈출 만큼 눈이 쌓인 것이 몇 년 만이던가? 교통 불편과 안전사고 걱정보다도 오랜만의 은빛 세상에 대한 감흥이 먼저 일어났다.
평소에는 가까이 가보지도 못하는 6차선 차로 한 가운데를 등산화를 신고 뒷골목 산책하듯 거닐었다.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매너 없는 운전자 때문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자동차 눈치를 보았었는데···· 길가에 나자빠진 자동차를 뒤로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6차선 차로의 중앙선을 따라 미끄럼도 지쳤다. 이 순간은 내가 이 넓은 차로의 주인이다. 언제 이 넓은 차로에서 거침없이 걸으며 여유를 부려 보겠는가? 네거리의 신호등은 졸린 듯 깜빡거리기만 한다. 이럴 때도 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뒤돌아보며 삶을 누리라는 뜻이 아닐까?
자동차를 끌고 다니기에는 위험하고, 버스가 연착되어 약속시간에 늦는다면서 짜증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미끄러운 길에서 엉덩방아 찧고 슬러시 같은 눈이 코트에 묻어 세탁해야 한다고 투덜거린다. 도시에서는 눈이 별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수많은 날 중에 이런 하루쯤이 어떠랴. 이 하얗게 개종한 세상이 주는 포근함을 세탁비와 바꿀 수는 없다. 넘어질 수도 있고 옷에 튈 수도 있지. 그런 일은 눈이 내리지 않더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눈을 옹호한다. 퇴직하고 갈 데가 없으니 이렇게 날씨에도 관대해진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이 동네 언덕길에서 널빤지를 타고 눈썰매처럼 지치며 내려왔는데 지금은 그럴 아이들도 없고 그렇게 한가로운 언덕길도 없다. 멀리 차를 타고 유료 눈썰매장을 가야 한다. 비탈진 눈길을 걷다가 쭉 미끄러질 때에 약간의 스릴도 있다. 하지만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집중해서 몸의 중심을 잡았다. 균형 잡는 운동도 되고 안 쓰던 근육도 쓰게 되어 좋다. 이런 발걸음 동작을 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는가?
땅에 닿은 발 뒷굼치를 몸의 중량감이 압박한다. 앞으로 발을 뻗을 때에는 허벅지에서 골반을 지탱하는 팽팽함이 상체로 전해진다. 평소 무심코 행하던 동작을 하나하나 관찰하게 된다. 발을 떼고 옮기고 체중이 지나가면서 고관절이 중심을 잡는 순간을 의식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지 않으면서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매 순간 깨어서 진지한 삶을 살아간다면 걱정도 갈등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순간순간 몰입해서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이렇게 눈 세례를 받은 골목길은 어느새 깨어있는 삶의 전도사가 되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모두 한 순간 한 순간 집중된 의식을 요구한다. 한 동작 한 동작에 진지함을 싣게 한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사정없이 엉덩방아를 안긴다. 엉덩이를 털면서라도 깨달으면 좋을텐데····
다음날 오전에 탄천 둔치에 가보니 날이 추워서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 넓은 눈벌판에 발자국 하나 없는 하얀 신천지다. 요즘 신천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여기는 완전히 새로운 흰색의 벌판, 하얀 신천지이다. “눈길을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말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 서산대사가 읊은 이 시 구절이 여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뒤따라 올 사람도 없다. 이 넓은 벌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걷든 내 자유다.
발자국 하나하나 선명하게 찍힐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여는 기분이다. 이 신세계에 내 발자국이 너무나 크다. 그러니 오히려 함부로 걸을 수가 없다. 절제해야만 자유로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 벌판도 깨어있는 삶의 전도사가 되었네! 이렇게 하얀 눈의 세례처럼 온 세상을 깨어있는 의식으로 개종시킨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처럼 내린 함박눈에서 삶의 가르침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