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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우연한 인연이 만든 잊지 못할 추억

by 홍재희 Hong Jaehee



벌써 묵은해가 되어버린 지난해 늦가을 11월 어느 날. 집 현관문 앞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00대 건축학부 3년생이라 자신을 소개한 학생이 남긴 글. 내가 사는 집을 과제로 삼고 싶다고 쓰여있었다. 꼬물꼬물 손글씨 글귀 하나하나에 그의 간절함이 전해져 왔다. 나만큼이나 이 집을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왜 이 낡고 오래된 다 쓰러져가는 옥탑을 사랑하는 지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 느꼈다. 그가 남긴 핸드폰 번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전화를 했고 그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따뜻한 차를 냈다. 생면부지인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앉았다. 어색하고 서먹한 공기를 바꿔보고자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에게 어쩌다가 이 집을 발견했느냐 물었다. 옥탑집을 찾아 동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우연히 내가 사는 집을 봤단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에 펄럭이는 알록달록 커튼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서서 한참을 올려다봤다 했다. 저 집이다! 저 집엔 누가 살까 정말 알고 싶었단다.



-자, 이제 궁금증이 풀렸나요?


그네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 커튼은 커튼이 아니라 제 스카프예요. 예뻐서 창에 걸어둔 거죠.

나는 그에게 하늘로 열린 옥탑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지붕에 비둘기 떼가 살아 구구구 아침마다 소란스러운 집, 베란다로 매일 똥이 우수수 떨어지는 집, 잊을만하면 집 안 곳곳에 거미가 둥지를 트는 집, 더없이 고와서 눈물이 나는 저녁노을을 날마다 마주하는 이 집, 흰 눈이 내리면 동화 속 옛날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네에 대하여. 그리고 계절마다 얼굴이 달라지는 하늘 그 하늘을 원 없이 우러러볼 수 있는 일상에 대하여. 사람 사는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산꼭대기 달동네 옥탑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풍경을 그리고 이 마을의 역사에 대하여. 흘러간 시간이 남긴 흔적이 집집에 서려있는 이 동네에 대하여.




그는 세상에서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 표정이 상기된 그를 보니 문득 지나간 내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저 나이에 저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을까. 저렇게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을까. 문득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아련하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그리움이라는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파문이 일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대화가 끝나고 그는 실측을 시작했다. 줄자를 들고 집 안 곳곳을 재면서 뭔가를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멀찍이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불현듯 알바가 끝나자마자 오느라 밥때를 놓쳤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끼니때 내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는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게 도리라던 어머니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와 저녁 밥상을 같이 하고 싶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저녁 못 드셨죠? 같이 먹고 가세요. 차린 건 없지만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벌써 8시를 넘어 있었다. 과제를 잘 만들어 보겠다고 씩씩하게 약속한 그에게 꼭 A+를 받으라 격려했다. 과제에 도움이 될까 싶어 그동안 이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저녁놀을 틈틈이 찍어둔 사진도 메일로 그에게 보내주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 그 보담도 사실은 묻고 싶었다. 어떤 건축을 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공간은 뭔가요? 어떤 집을 짓고 싶어요? 집이란 당신에게 무엇이죠?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묻고 또 묻고 듣고 또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악보, 설계도가 그려지지 않은 백지일 그의 열린 미래를 위해 내 질문은 마음속에만 고이 남겨두기로 했다.





지난달 12월.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과제는 A+을 받았고 감사의 뜻으로 저녁을 사고 싶다고. 우리는 나란히 분식집에서 떡만둣국과 칼국수를 먹었다. 비싼 레스토랑 식사보다 더할 나위 없이 맛있는 밥상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쇼핑백에서 모형을 건넸다.


-이거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과제로 만든 실측 모형이랍니다. 드리고 싶어요. 받아주세요.



생각도 못한 기대 하지도 않았던 특히 세상에 하나뿐인 무언가를 선물로 받을 때면 언제나 놀랍다. 상대의 마음이 불쏘시개가 되어 내 마음에 불씨를 지핀다. 온정이라는 불이 타탁타탁 이는 것만 같다.


-과제 발표 때 교수님이 정말 좋아하셨어요. 이야기가 있는 집이라고요. 하늘계단집 옥상 정원 같은 집이라 하셨어요. 이게 다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인형의 집 같은 모형에 가까이 눈을 대본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세트 촬영장처럼 보인다. 부처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집. 앙징맞다. 나는 공중부양을 해서 하늘의 눈으로 집안을 내려다본다. 신기하다. 내 집도 아니고 세 들어 사는 집이지만 이런 식으로도 내가 사는 집을 보게 되다니. 아, 참 기뻤다.



- 언젠가 이 집에서 이사 가야 할 때 이 공간을 떠난 후에도 이 집이 허물어진 후에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네요. 최고의 선물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정류장에서 그를 배웅했다. 차에 오르기 전 그가 수줍게 내 손에 뭔가를 쥐어주더니 메리 크리스마스! 뿌리칠 새도 없이 후다닥 차에 올라버렸다. 차창으로 내게 손 흔들며 활짝 웃는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와인 한 병. 제과점 카운터에서 알바를 한다고 했으니 알바로 번 돈으로 이걸 샀을 것이다. 노동해서 번 피 같은 알바비로 적이 4-5만 원은 되는 와인을 사다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를 태우고 떠나간 버스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 순간 예전 르 코르뷔지에의 책 「건축을 향하여」에서 읽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젊은 날 여행은 깊은 의의를 지닌다."



이제. 이제 갓 스물 하나. 그 앞에 펼쳐질 미래를 위해 그의 젊음이 인도하는 여행을 그의 인생길을 건축가의 길을 응원하며.


질문하는 걸 주저하지 마세요. 뭐든 질문하세요. 정답을 찾기보다 질문을 제대로 하는 게 인생에서 더 중요합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으니까요. 자신만의 해답을 찾으러 여행을 많이 하세요.


한 곳에 오래 머물고 보고 듣고 배우고 또 주저 없이 떠나세요. 자신의 행동에 너무 소심하거나 너무 까칠하지 마세요.


모든 삶은 실험이지요. 실험을 더 많이 할수록 더 나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대가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고 제가 기꺼이 그 문을 열었듯이.


어디든 누구든 무엇을 만나든 두려워하지 말고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좌절하고 패배하기를 . 다시 질문하고 또 떠나기를: 그렇게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단단하게 사랑하기를.


그리하여 맑은 눈과 밝은 마음과 뜨거운 열정과 굳은 의지를 지닌 좋은 건축가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김지영 씨.



심심할 때마다 가끔 지영 씨가 만든 모형을 들여다본다. 그때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난 유독 모형을 좋아했다. 종이로 만든 집을 가지고 혼자 이야기를 만들며 놀던 기억이 난다. 박물관이나 모델 하우스에 갈 때마다 유리상자 안에 든 모형으로 만든 빌딩이나 거리 도시를 보면 넋이 나가곤 했다. 세든 집에서 어느 날 짐을 싸게 되더라도 이곳을 기억 속에 영원히 봉인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생겼다. 기쁘게 회상할 즐거움이 하나 더 늘었다. 이참에 이쑤시개를 잘라 사람 하나 만들어 작고 귀여운 내 집에 넣어 두어야겠다.



만일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다시 대학생이 될 수 있다면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면 난 건축학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란 것은 꼭 내가 이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꿈꾸는 자에게는 꿈을 꾸는 그 순간이 더 찬란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이라 해도 같은 꿈을 꾸는 자를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길에서 만나 그의 꿈 귀퉁이를 잠깐 비춘 햇살 한 줌이 되었다면 내 꿈은 이미 실현된 것이다. 작은 용기와 작은 친절이 맺은 우연한 인연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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