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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마흔 이후의 인간관계

by 홍재희 Hong Jaehee

1.


결혼하고 나서 한동안 소식이 뜸했다가 오밤중에 만취해서 내게 전화를 모 배우가 있었다.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었고 독립 영화에도 출연했던 배우였다.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 통성명을 하고 서울에서 만나면 한 번 봅시다, 했다. 그녀가 잊지 않고 내게 연락을 했고 우리 동네로 놀러 왔다. 그렇게 같이 커피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밥도 먹고 술 한 잔도 기울이면서 서로를 알아나갈 즈음. 몇 번의 만남 끝에 깨달았다. 아, 이 사람과는 오래 만나기는 어렵겠구나.



초면에 화끈하고 화통하며 시원시원했던 그녀는 알아갈수록 종잡을 수 없었고, 불안정했고, 충동적이었으며, 가볍고, 날아갈 듯했고, 사정없이 치달았다. 초면에 끌렸던 그녀에게 느꼈던 매력이 그녀의 단점이자 결점이었다. 직업이 배우니까 누구보다 예민하겠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니까 그렇겠지 생각했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무언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게 점점 피곤해졌다. 뭐랄까. 기를 야금야금 쪽쪽 빨리는 느낌. 동시에 '귀찮다'라는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내가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자성하기도 했다.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을. 결이 안 맞는 사람끼리는 의도하던 하지 않든 간에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먹하다가 만나면 만날수록 편안해지는 관계가 있는 반면 어떤 이는 초면에는 반짝 불타오르다가 만남을 거듭할수록 불편해진다. 그럴 때 빨간 불이 들어온다.



그녀는 서른이 넘으면 잘 풀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풀리기는커녕 돈 못 버는 배우 생활은 여전했다. 무명 배우 생활에 서서히 지쳐가는데 외모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자신감은 사라지고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눈 떠보니 덜컥 마흔이 되어있을까 봐 너무 두렵다고 했다.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그녀는 와인을 원샷하면서 불쑥 물었다.


"나도 이런데.. 그런데 어떻게 버티고 있어요? 잘 지내요?"

"저요? 네. 전 잘 지내요."

"거짓말! 돈도 없으면서."

"돈이 많지 않은 거지 아예 없는 건 아네요."


내 말에 그녀가 빵- 터졌다.


"맞아. 그렇긴 한데.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그거 하나도 버텼는데. 그런데 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자신도 없고. 피곤하고. 지쳤달까. 연극도 예전처럼 재밌지 않고. 연기도 그렇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래봤자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배우인데...... “

”남이 알아주든 말든 배우잖아요. 그건 변하지 않잖아요? “

“집에서 자꾸 선 보래요. 나 더 늦기 전에 그냥 확 결혼해 버릴까? “


나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뭘 하든 진짜 바라는 걸 원하는 걸 찾길 바랄게요.”


얼마 후 그녀에게 맞선과 다를 바 없는 소개팅을 나간 자리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와 그녀의 인연은 거기까지, 끝난 줄 알았다.



2.


그런데 거의 일 년이 지난 후 뜬금없이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 후 대학로를 뜨고 남편의 시댁이 있는 경기도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애를 낳았다 했다.

그녀는 결혼을 괜히 했다는 둥 결혼한 게 후회가 된다는 둥 대학로가 연극이 배우생활이 싱글이었을 때가 그립다는 둥 하소연을 했다.

위로하는 마음에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나는 물었다.


"그럼 애를 좀 키워놓고 나서 다시 배우일을 시작하면 어때요?"

"남편이 싫어해요. 시부모도 그렇고. 결혼할 때 조건이 다시는 배우를 하지 않는다였고. “

"그래도 정 하고 싶다면?"

"잘 모르겠어요. 다시 하고 싶다가도 해봤자 안될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정말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네요? “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요...? 결혼하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이럴 줄 몰랐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답답해졌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결혼한 건 본인이잖아요. 그것도 자기 선택이에요. 결혼하기 전 가난하게 살기 싫다. 더 이상은 돈에 쪼들리기 싫다. 돈 없는 배우, 연출, 가난한 놈 만나기 싫다. 그래서 돈 많은 놈 잡아 결혼할 거다.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요? "

"아니. 그렇게 말하면! 그건 아니죠! "

"그럼 뭔데요?"

"지금 남편 처음 만났을 때 나 같이 예쁜 여자는 처음 본다고 해서... 날 좋아한다니까 결혼하자니까 그랬던 거지. “


두서없는 이야기. 횡설수설. 걷잡을 수 없이 여과 없이 쏟아지는 말, 말, 말들.


"지금 혼자 술 마시고 있어요?"

"네."

"애는요?"

"자요. 자니까 마시지. 한 번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집 겁나 커요. 전원주택이야. 정원도 넓고. 근데. 너무 심심해. 외롭고. 지루해."

"..... "

"알아요. 멀어서. 오기 힘들겠지.... 그래도 오면 같이 술 마시고 싶다. "

"....."


시부모가 아래층에 산다 했다. 하지만 자기네는 위층에 살고 출입문이 달라 서로 터치 안 하니까 날더러 놀러 와도 된다고. 놀러 오라고.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워서 에둘러 거절했지만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난 00이랑 남산 공원 풀밭에서 와인 마셨을 때가 가장 재밌었어. 그때가 자꾸 생각나."

"남편은?"

"남편? 오늘 안 와요. 출장 갔어. 안 와도 돼. 필요 없어. 말도 안 통하고."

"........."

"아니 말 나온 김에 그냥 지금 오면 안 돼? “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

“그러지 말고 택시 타고 와요. 내가 주소 불러 줄게. 택시 타고 와. “

"얼른 자요. 그만 마시고. "

"나 돈 많아요. 돈 많아. 그니까. 택시비 내줄게요. 놀러 오라고."



그게 어떻게 당신 돈이야? 남편 돈이지! 하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기가 찼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남 탓은 해도 자기 탓은 없다. 그녀는 내가 듣거나 말거나 가진 게 돈 밖에 없다는 '맘에 안 드는' 시월드와 '애정이 안 생기는' 남편에 대한 불평을 한 보따리 늘어놨다. 오죽하면 그럴까도 싶었지만 한편으로 피곤하다 귀찮다는 마음에 지고 말았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공감해 주는 척했지만 사실 나는 듣지 않았다.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려놓았기 때문이다.


“내 말 듣고 있어요?"

“미안한데. 이제 그만 끊어야겠어요. 술 그만 마셔요. 얼른 자요. 저 끊을게요."



젊은 날 한 때 열정을 불살랐던 연극 대신 돈이라는 현실을 선택한 그녀.


'대부분 남자는 능력이 생겼을 때 결혼을 결심하지만 보통 여자는 불안할 때 결혼을 결심한다.‘


라는 말이 있다.


그녀도 그랬던 것일까.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일이 풀리지 않고 나이 듦이 주는 두려움에 흔들릴 때 그녀는 꿈을 포기하고 결혼으로 도피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떤 선택을 했든 간에 그 선택을 한 순간에 자신은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제가 선택한 인생을 스스로 깎아내리고, 제가 선택한 사람을 깔보고 흉보는 사람만큼 비루하고 비천해 보이는 이도 없다. 이 사람. 제 얼굴에 침 뱉는 줄도 모르는 사람이구나. 실망했다. 안 봐도 그만인 사람이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아득한 피로가 몰려왔다. 쓰다만 문장 위를 깜박이는 커서. 나는 텅 빈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이 말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아, 피곤하다.



3.


그리고 나는 그녀를 까맣게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다. 어머니가 입원해서 수술을 하고 24시간 보호자로 간병을 하던 때였다. 코로나 때문에 외부이의 출입이 통제되고 환자의 상주 보호자 역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석 달 동안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고 있던 그때. 무더운 여름날이었던가. 점심을 물리고 나서 잠시 찾아온 휴식 시간. 병동의 작은 휴게 공간에서 숨을 돌리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마지막 전화 통화를 한 지 반년이 훨씬 넘은 뒤였다.


"어디예요? 애기 좀 할 수 있어요? "


시간을 보았다. 병실로 복귀하기까지 십오 분 정도통화할 수 있겠다 싶었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반갑기도 하고 일말의 귀찮음도 있는 묘한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전화를 받았다.


"네. 잠깐 동안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요?"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보고 싶더라. 요즘 어떻게 지내요?"

"저기. 제가 지금 병원이에요."

"병원? 왜? 어디 아파요? “

"저 말고 어머니가 입원했어요. 수술하셔서. 제가 간병 중이에요."

"언제까지? 그럼 언제 퇴원하는데요?"


언제. 퇴원하는데요.라는 말이 목에 탁 걸렸다.

이 사람은 정말 자기 생각밖에 안 하는구나.

더운 바람 너머로 짜증이 훅, 몰려왔다.

최대한 부드럽게 대답하려고 했지만 내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또다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엔 당시 나는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별로 기억도 나지 않은 인사치레 상투적인 말들이 오고 갔다.

올려다본 하늘에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구름을 눈으로 쫓으면서 나는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코로나 시기라 밖에 못 나가요. 언제 퇴원할지는 아직 모르고요. "

"그렇구나. 퇴원하면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와요. 내가 마중도 나갈게요."


그때 통화 중 전화 알림. 어머니였다. 아, 병실에서 나를 찾는가 보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구세주 같았다.


"저기. 엄마한테 전화 왔어요. 미안한데 병실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요. 그럼 이만 끊을게요. 잘 지내요."


아프고 힘들고 괴로우면서도 아니라며 뻗대고 잘난 척으로 약한 내면을 감추고 남 탓하는 자격지심에 쩔은 남자들도 피곤했지만 홀로 서기를 못하는 여자들을 보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었다. 이런 사람은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으면서 그저 불안감에 자신을 달달 볶는다. 자신을 괴롭히다 못해 가까운 사람 옆에 있는 사람까지 불안에 감염시킨다.


그녀들이 사랑과 돈에 목매고 불안감에 안달복달하다가 남자 한 명 잡아 결혼으로 골인하는 걸 보고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을 그 사람의 남편이 대신할 것이다. 이런 이들일수록 자신의 일상이 평온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연락을 끊고 잠잠해진다. 그러다가 또 일이 안 풀리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불안에 사로잡히면 길을 잃고 헤매는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 전화통을 붙들고 누구의 번호를 눌러대겠지. 미련 없이 관계를 끝내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잘 가라. 안녕. 더는 연락하지 마라. 연락한들 더는 받지 않을 거다.



ㅡ 그 뒤로 한참 시간이 지나 늦은 밤에 몇 차례 더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하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4.


적어도 마흔이 넘으면 (빠르면 삼십 대 중후반부터) 인간관계가 녹록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어릴 때와는 달리 한 번의 만남에도 써야 하는 에너지의 총량이 확연하게 커진다.

나이 들수록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데 예의를 지키고 상대와 주변을 신경 쓰고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에 에너지를 더 쓰게 되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놀려고 좋아서 신나서 만나고 떠들고 헤어지던 어린 시절이나 친구들과 불나방처럼 쏘다니던 이십 대처럼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외향적인 성향이라 할지라도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전에 비해서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일을 하면서도 에너지를 쓰고 생계를 위해서 또는 가족을 위해서 아니면 이런저런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처리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도 에너지를 써야 한다.

결국 일이든 아니든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어떤 식으로는 사람을 만나게 돼있다. 이렇듯 각종 인간관계에서도 에너지를 써야 하므로 사적인 관계에서까지 쓸 에너지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나이 먹고서도 어릴 적 학창 시절 친구에게 똑같이 대하고 말하면 이제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는 말은 그래서 거짓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하고 경험이 사람마다 다른데 사람이 어떻게 안 변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나이 들수록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관계는 현재와 미래를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점점 멀어진다.

아니면 어느 정도 선까지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40대 이후에 내향인인 사람이라면 일 년에 한두 번만 만나도 절친이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 사이라도 그렇다. 내향적인 사람은 내향적이므로 이 격차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소모적인 관계에 피곤했고,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아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이 들면서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고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걸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외향적인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이를 느끼면 굉장히 당황하거나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지? 관계가 줄어드는 걸 외롭다고 느끼고 이를 괴로움으로 인식한다. 나이 듦이 주는 성숙함이고 나뿐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것이다라고 이해하고 수용하기를 두려워한다.


나이 들면서 사람을 더 자주 만나고 싶고 더 많이 만나고 싶고 이런 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만나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즉 상대방의 데이터를 의식하지 않고 자기 본위대로 만난다는 뜻인데, 그러면 상대방은 불편하니까 이 사람을 피하게 된다.

주변에 사람이 점점 없어지니까 없어질수록 이런 사람은 점점 더 사람을 찾고 만나고 싶어 하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 들면서 점점 사람을 더 많이 만나고 싶고 더 자주 찾는다는 건 혹여 내가 나이 들수록 성숙하려는 노력에 소홀했던 건 아닌가 하고 한 번쯤 돌이켜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자신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삶과 사람 그리고 인생에 대한 많은 경험치가 쌓여서 인간에 대한 데이터가 늘어난다는 것, 자기 성찰과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던지 간에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게 되는 건데 이렇게 상대에게 집중하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라면 사람을 만나는 게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의식적으로는 피곤한 줄 인식하지 못해도 무의식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이미 피곤하다.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사람이 싫어지는 것과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은 것은 전혀 다르다.

그 사람 자체도 좋고 만나면 재밌는데도 피곤할 수 있다.


이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도 나이 듦에 필수적이다.


나는 그 사람을 싫어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한가.

다시 말해 지금 나는 어떤 타이밍에 있는가?

그 사람이 싫은 건가? 사람을 만나는 게 피곤한 타이밍인가?


이를 구분하기란 사실 어렵지 않다.


만나고 돌아와서 내 기분이 어떤가를 들여다보면 된다.


뭔가 피곤하면서도 기분이 좋다면 그냥 사람을 만나는 게 관계를 맺는 게 피곤한 것이다.

만나고 돌아와서 뚜렷한 이유는 없는데 뭔가 기분이 찜찜하고 불편하다면 그 사람, 그와의 관계가 싫은 것이다.

좋은 사람, 내게 맞는 사람과 만나도 기분 좋은 날, 기분 나쁜 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럴 때는 이유를 뚜렷하게 분명히 알 수 있다.

아, 이 사람하고는 이 부분이 안 맞는데 그게 이번에 딱 드러났구나.

나는 이 사람의 이런 점이 맘에 안 드는구나, 별로구나 또는 나의 이 부분은 상대에게 안 좋은 모습으로 비쳤겠구나.

이 사람은 이런 걸 싫어하고 나는 이런 걸 싫어하는구나.

그래서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고 주의하게 된다.

이것 또한 사람을 알아나가는 과정, 즉 인간과 경험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나가는 과정이다.



청소년기나 청년기에는 경험과 데이터가 없으니 세상이 두렵고 무섭다.

그래서 좋든 싫든 누군가와 항상 연결되어 있고자 하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불편해도 적당히 싫어도 참고 누구든지 친구들과 붙어있으려고 한다.

우정이나 연애에 있어서도 똑같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성숙해지면 '혼자' 있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알게 된다.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혼자 있으려고 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고립되거나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즐기는 것. 즉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이 들수록 필요한 작업은 바로 자기 자신과 먼저 친구가 되는 것이다.



5.


칼 융은 중년에 이르러 사람은 개인화, 개성화 과정이 온다고 했다.

사람들 만나기 싫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과정이므로 나에게 집중하는 시기라는 의미다.

성숙한 사람은 혼자 있어도 편하고 자연스러운 법.

반면 고독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기 몰입이 두려운 사람들에게는 중년의 위기와 우울증이 문을 두드린다.



개인사적으로 힘든 일과 위기를 겪거나 상처와 고통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 중에는,

인생에서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고 나서 혼자 있지 못하고 홀로서기를 회피하면서 주변인들까지 힘들게 하는 이들이 있다.

이 말은 아프고 힘든 이의 주변에 있어주는 것이 나쁘다는 뜻도 아니고 힘든 이의 옆에 있지 말라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혼자인 시간을 못 견디는 것은 상대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소리다.

상대에게 의존하고 매달리고 관심과 애정을 갈구할수록 더욱더 집착하게 되고 사람이 점점 추해진다.

외로움을 타며 혼자 있는 걸 못 견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새로 맺거나 유지할 때 피곤한 사람이 되기 쉽다.

만나서 상호작용을 할 때 뭔가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만 목젖까지 가득 찬 사람,

자신의 이야기만 끊임없이 배설하고 상대가 들어주기만을 바라는 사람,

자신의 결핍을 내보이면서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다시 말해 만났을 때 에너지를 많이 써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어느 정도 유지되어야 행복감과 안정감을 느끼고 타인에게 지지받는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혼자 지내며 인간관계 디톡스를 하는 시간과 다시 관계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시기가 너무 멀어져도 안 된다.

그 중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알아가는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다.

혼자 있어도 좋고 같이 있어도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서로 존중과 배려를 하고 필요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이들과도 잘 지낼 수 있다.

(혼자 잘 지내는 사람은 혼자서도 잘 노니 눈에 잘 띄지 않지만 ㅎ)



6.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마음속에 쌓인 감정과 서사를 자꾸 밖으로 배출하려는 욕망이 있다.

그런데 이를 지금까지 남을 통해(친구든 지인이든 애인이든 가족이든), 다른 이를 만나서 말로 푸는 걸로 해소해 왔다면, 나이 들수록, 이를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글쓰기다.

글쓰기는 자아성찰의 도구이자 매개체,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글, 잘 쓴 글이 아니라 나 자신과 대화를 하기 위한 글.

막연한 나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즉 자기를 객관화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관계에 매달리지 않는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

둘째, 나이 들수록 가벼운 마음으로 어울리는 사람이나(친구든 지인이든) 집단이 있을 것.

셋째, 혼자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취미와 취향을 가질 것.

단, 취향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여기서 여유는 경제적 여유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마음, 즉 정신적 여유가 더 중요하다.)



7.


남들 보기에는 사람들과 늘 함께 있는 것, 만나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친구 한 명 없는 걸 슬퍼하기보다 나쁜 친구 한 명 없는 게 인생에 더 유익하다.

사람을 만날 때는 '착한 사람'과 '좋은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똑똑한 사람'과 '현명한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돈만 많은 사람, 부자인 사람'과 '여유 있는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남 보기에 좋은 관계에 연연하거나, 혼자 있기 외롭다는 이유로, 불안해서, 해로운 인간관계에 연연하거나 이성관계에 의존하거나 자신을 갉아먹는 관계를 놓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보기에만 좋을 뿐 내용물은 꽝이고 포장지가 다일 수도 있다.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고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주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사람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은 내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한테는 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왜 있지? 왜 많지?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만 거기에 꽂히게 되면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좋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내가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인생에서 좋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으면 나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인생에서 인연을 만나기도 하지만 악연을 만나기도 한다. 때가 그런 것이다.

내가 뭔가를 대단히 잘못했거나 실수를 해서 안 좋은 사람과 인연이 꼬이는 것이 아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그런 것이며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현명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이 시행착오를 덜 하는 사람이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시행착오를 계속하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인생이 힘든 것이다.

아직 이를 깨닫지 못해서 세상에 나만 혼자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혼자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혼자가 되도록 스스로를 만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 상황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혼자 두려고 하지 않는다. 고립되도록 놔두지 않는다.

스스로가 깨닫지 못하면 모든 불운과 나쁜 악연을 운명으로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세상에 인간관계에서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ㅡ 인생의 데이터, 인생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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