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책을 선물한다고 한다. 우리도 어릴 적부터 명절에 세뱃돈보다 책을 선물해 주었다면?
습관이 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어떤 책을 선물해야 할지 모른다. 읽지 않으니 책을 고르기도 어렵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종종 책을 선물하곤 했는데 그때 책을 받은 사람들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선물 받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책을 선물로 주는 것을 그만두었다. 누구나 독서를 좋아할 거라 생각한 것도 착각이고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도 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가 좋아한다고 남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상대가 좋아할 만한 것을 선물하는 것이 맞다.
나는 책을 선물 받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책을 낸 후로 출판사 분들에게 이따금 책을 선물 받고는 하는데 그 책을 받아 들고 책 냄새를 맡고 있을 때 정말 행복하다. 부자가 된 것 같다. 줄판사 분들은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 마냥 내가 때 마침 눈여겨보고 있었던 신간을 보내준다. 이해받는다 소통하고 있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을 만들고 책을 내고 책을 선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동류의식 동질감 같은 것이 있다.
나는 남의 집에 갈 때 그 집 책장부터 보는 버릇이 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훑어보면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지 대충 감이 온다. 그가 가진 책을 보면 이 사람의 사고가 어디까지 펼쳐졌겠구나 어디서 멈추었구나까지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남의 집 책장을 들여다보다 생긴 습관이다.
어린 시절 집에 있는 책을 모조리 읽고 나니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었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들 책값을 대느라 어머니는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했을 것이다. 십 대 시절 내내 중고교 학교 도서관 책을 모조리 섭렵한 후에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은데 돈이 없어 사지 못할 때면 친구 집에서 빌려 읽었다. 그래서 동무들 집에 갈 때마다 그 집 책장을 쳐다보는 게 일과였다. 내가 읽어 보지 못한 책이 책장에 꽂혀있으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안 읽은 책 못 본 책이 있으면 빌려달라 사정을 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그 책을 꼭 읽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잘 때 머리맡에서도 눈앞에 책 제목이 아른거렸다.
그건 마치 열병과도 같았다. 사람을 향한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짝사랑.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뭐라도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시절. 책에 대한 탐식과 탐닉이 암울한 시기를 밝혀준 유일한 벗이었다.
새 책을 사기엔 주머니가 궁하니까 용돈을 모아서 학교 앞 헌책방에 가서 책을 사서 읽고 다시 돼 판 돈으로 다른 책을 샀다. 과거에 도둑질을 한 적이 두어 번 있다. 둘 다 책을 훔쳤다. 중학생 때 헌책방과 교보문고에서 책을 훔쳤다. 다행히 들켜서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지는 않았다. 그때는 도둑질은 나쁜 짓이라는 생각보다 읽고 싶다 가지고 가서 내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컸다. (책 훔치다 걸린 이야기는 나중에 지면에 풀기로 하고)
성인이 되어 알바를 하고 돈을 벌어 서점에도 가고 내 돈으로 첫 책을 샀을 때 그 희열이란! 대학을 갔을 때 가장 행복했던 건 광대한 도서관에서 돈 안 내고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과 성적은 신통치 않았으나 책을 원 없이 빌려 읽었으니 등록금이 아깝진 않다.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잘 들인 좋은 버릇이 책 읽는 습관이라 생각한다. 평생의 친구 어디서든 함께 할 동반자를 두었으니 외롭지 않다. 이 얼마나 행운인가! 먼 훗날 눈이 침침해져서 돋보기로도 글자가 안 보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세상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슬픔일 것이다. 더 이상 책을 읽을 수도 읽히지도 않는 날이 온다면 그날이 아마도 내가 세상을 떠나게 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