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즐거울 때도 가지만 우울할 때도 영화관에 가거나 도서관에 간다.
일주일 넘게 극강 한파에 집안이 냉동고로 화하는 바람에 욕실에서 볼 일을 못 보고 있다. 이럴 때 코 앞에 도서관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도서관에서 세수도 하고 화장실도 맘껏 쓰고 식당에서 밥도 해결하고 무엇보다 따뜻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세상 온갖 시름을 잊게 해주는 책도 산더미처럼 많다. 그 찰나 봄볕 아래 나른한 졸음처럼 여름날 모래톱에 출렁이는 물결처럼 안도감이 충만감이 몰려온다.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지금 난 무척 안녕하다. 간혹 보면 도서관에 노숙자가 와서 책을 펴놓고 엎드려 자고 있다. 그 옆을 지나면 쾌쾌하고 찌든 시큼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이 추운 날 도서관을 애용하는 그와 나는 다르지 않다. 괜히 반갑다. 그에게도 이 얼마나 다행인가.
암담하고 절망적이었던 어린 시절 그리고 사춘기. 집이던 교실이던 어느 곳도 안식처가 되지 못한 내가 도망친 구석. 유일하게 숨어 들어갔던 곳이 도서관이었다. 사서가 문 닫을 시간이라고 말할 때마다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집에 가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갈 데도 없었다. 도서관 창 밖으로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무너지도록 슬펐다. 사는 게 고달팠고 살아야 하는 게 슬펐다. 도서관 책 더미 속에서 석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흔적도 없이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한 아이. 죽고 싶다고 입술을 깨물며 되뇌었던 아이. 살고 싶지 않아서 혼자 울던 그 아이. 기쁨과 슬픔이 같은 이름이라는 걸 일찍 깨우쳐버린 그 우울한 소녀. 내가 자꾸만 떠오른다. 아마도 난 그때 우울증을 몹시 심하게 앓았던 모양이다.
내 우울감은 아주 오랜 어린 시절부터 비롯되었다. 그 기분은 아주 급작스레 예측할 틈도 없이 찾아오는데 그 순간이 들이닥치면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어진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그냥 가버리고 싶다는 너무도 강력한 충동. 땅이 무너지고 갈라져 그 깊은 지구 핵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기분, 마치 땅이 나를 움켜주고 저 깊은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는 기분. 숨이 멎을 것 같다가 동시에 우주 진공 속을 유영하는 듯한 황홀감에 사로잡힌다. 그럴 때는 눈을 질끈 감고 가만히 죽은 듯이 드러누워 있어야 한다. 극도로 휘몰아친 죽음 충동이 그 격렬한 감각이 저절로 사라질 때까지 오로지 기다려야 한다.
이런 걸 도대체 뭐라 부르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이 충동은 사춘기 때 가장 심했다가 점차 사라져서 성인이 된 후로는 일 년에 한 번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띄엄띄엄 찾아오는데 여전히 느닷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쨌든 이제는 친구처럼 익숙해져서 불현듯 급습하는 극도의 우울감을 그저 숨죽이고 인내한다. 그 후부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은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저 죽고 싶어서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 그때부터였을까. 언제든 죽을 수 있으니 기왕 죽을 거라면 기쁠 때 즐거울 때 더 이상 삶에 후회 없을 때 죽고 '싶어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불현듯 우울증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스쳤다. 이게 다 책 때문이다. 스스로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 가차 없이 세상을 등진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울먹이던 어머니는 내게 귓속말로 이렇게 웅얼거렸다. 네 아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도 몰라. 남들한테는 말하지 마라.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되뇌었다. 늘그막에 병들어서라도 자식들에게는 결코 짐짝이 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당신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결연히 지킨 약속이 아닌가. 타고난 결벽증으로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거짓말로 삶을 꾸며대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야 한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라도 이야기를 꾸며대고 웃어대고 거짓말을 했던 나처럼.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스스로 떠난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한 대목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팍에 푹 꽂힌다.
'나이 든다는 건 자꾸만 뭔가를 잃어버린다는 것. 상실한다는 것.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은 어쩌면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
상실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던 당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당신이, 그리하여 과거에 사로잡혀 오지 않는 미래를 두려워한 당신에게는 숨 쉬는 지금 이 순간 현재가 불안이자 곧 공포였으며 그런 당신이 스스로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죽음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우울은 세상에 대한 저항(크리스토퍼 레인)'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우울을 당신의 죽음을 세상이 부르는 그 따위 이름으로는 부르지 않겠다. 나는 당신의 선택을 '자유죽음'으로 부르겠다.
태어나자마자 병마에서 살아남으려 사력을 다해 엄마의 젖을 빨아댄 아기는, 세상에 대해 우울로 분노로 저항했던 그 아이는, 수없는 밤을 알코올로 도망가고 제 어리석음에 발등을 찍으며 휘청거리며 살았던 그 청춘은, 이제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웃을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돛을 잃은 배처럼 오랜 세월을 떠돌다 이제 다시 삶이라는 '도서관'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은 그 한 사람, 나는 더 이상 우울과 맞서 싸우지도 우울을 회피하지도 우울에 잠식되지도 않는다. 그 대신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모순적인 이 세상에 저항하는,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위해 싸우고 있는 나 자신을 더 이상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기로 한다.
나는 내 안의 우울이 그저 내 안에서 휴식을 찾기를 바란다. 지치고 힘들고 병든 우울이 더 이상 내 안에서 길을 잃고 울며 방황하지 않도록.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알몸으로 저 어둔 바다를 홀로 헤매지 않도록. 내 안에 그를 위한 방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기다린다.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또 찾아올 그 우울을 위해. 그와 더불어 그의 등을 토닥이며 함께 가는 인생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것 사라지는 것 잃어버리는 것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삶을 위해. 세상에 모든 우울한 사람들 그리고 우울한 벗들과 함께 더불어 가는 길을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삶을 향해.
최근에 그리고 오늘 밤 잠 못 이루는 그 누군가에게 우울한 모든 이들이 그렇게 나와 같이 생각할 수 있다면. 내가 거기 있지 않아도 당신이 여기 있지 않아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함께 있는 것이라고. 작고 사소한 것들에게서도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면 순간을 영원처럼 느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울은 더 이상 적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가시밭길을 함께 걷는 동무가 되어줄 것이며 그토록 당신을 배반하던 삶에서 행복은 먼 데 저 밖이 아니라 바로 그대 안에 그대가 올려다본 저 하늘에 별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