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다.
프리랜서가 어울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전자다. 물론 내가 딱 프리랜서에 어울리는 기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에겐 유독 잘 맞는 옷이다.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아침 꼭두새벽부터 부산을 떨어야 할 까닭도 없고 무얼 입든지 내 맘대로 할 수 있으니 개이득이다. 집단보다는 개인에게 더 중점을 두는 성격상 타인의 통제를 받기보다는 자기 통제하의 프리랜서로 사는 게 나한테는 훨씬 편하다.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과 퇴직 연금과 보너스는 없지만 내게는 돈보다는 자유가 더 중요하다.
어쩔 수 없다. 남이 이래라저래라 감 놔라 배 놔라 잔소리하는 것도 듣기 싫을뿐더러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도 체질에 안 맞는다. 어릴 적부터 뭐든 나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숙제든 공부든 내가 해내기 전에 남이 도와주는 걸 싫어했다. 부모든 선생이 무조건 하라고 시키면 싫었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으면 반항했다. 시키는 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고집이 세다는 말도 무수히 들었다.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일을 해낼 때 보람이 더 컸으니까. 프리랜서로 사는 건 어쩌면 내게는 정해진 수순 같은 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여유로워 보이는 프리랜서는 실은 1인 다역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쓰고 전화를 걸고 받고. 제안을 받아들이고 거절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마감하고 인건비와 임금을 논의하고 통장 계좌를 확인하고 다시 연락을 하고. 만날 약속을 잡고 회의를 하고 다시 자신을 위한 비서가 매니저가 되고 파출부도 하고 잡일도 하는. 프리랜서는 현대사회의 계약직 용병이기도 하며 불안정 고용이라는 바다에서 매 순간 바람을 타야 하는 직업이다. 불안하고 고단할 수도 있는 삶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 삶을 지속하는 이유는 일상의 자기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 삶이 온전히 내 의지와 자유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 그것 때문이다.
매번 아픈 허리를 붙잡고 어깨통증에 시달리면서도 헬스장에 가야지 살아야지 하면서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고단한 자기 규율과 엄격한 자기 통제를 실천해 가면서 이 삶을 지속해 나가는 이유는,
이 삶의 방식이 나에게 적합하기 때문에 가장 큰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직접 조직, 관리하고 이끌어나가는 감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혼자 일하는 시간을,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풀어놓고 진행하는 통제하고 만들어가는 이 삶을 놓치고 싶지 않다. 고독과 고립 속에서 만끽하는 자유란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충만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게으름뱅이도 문제없어 보이게 하는 삶이 혼자 일하는 삶, 프리랜서의 삶이다. 사람들을 만나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자극과 갈등에 시달리지 않고도 오롯이 혼자 일할 수 있다고 해준 이 일에 내 삶에 진실로 감사하다.
지난 코로나 시대에 집안에만 갇혀 있어서 힘들다 미치겠다는 사람들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집에 혼자 있는 게 죽겠다는 이들은 집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반면 나는 혼자 오래 있어도 미치지 않는다. 집에 있는 게 좋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은 나의 은둔적 성향 탓이다.
예전에는 집밖으로 돌고 두루두루 사람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쏴 돌아다니고 한 곳에 가만있지 못했다. 나이 먹고도 부모집에서 얹혀살 때는 더 그랬다. 밖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활동적이라며, 더 나아가 선이라 권장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때는 나 같은 사람이 유리하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나는 가만히 있어도 적응자다. 하던 대로 하고 살면 된다.
일이나 약속이 아니고서야 우르르 몰려다니는 거 원체 싫었다.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여자애들은 등하교 때나 교실이나 매점이나 화장실에 갈 때도 손 붙잡고 꼭 같이 다녔다. 화장실도 같이 가자는 통에 질겁했다. 24시간 붙어 다니는 데 너무 질려서 귀찮아서 거리를 두던 기억. 귀갓길만큼은 혼자 가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일 때는 항상 밥 같이 먹으러 가고 수다 떨러 카페 가고 도서관 가서 같이 공부하자는 과 여자애들 피해 다녔다. 동네에 자주 가는 목욕탕에서도 아주머니들은 묙욕탕계를 하는지 매번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어떻게 그러는지 나 같은 사람은 신기할 뿐이다. 나는 숨을 쉴 나만의 공간, 내 영역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 개인의 거리를 지워버리고 관계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의존적인 사람들이 몹시 버겁다.
나는 극장이나 영화관 미술관 음악회도 웬만하면 혼자 가서 감상한다. 여행도 떼로 몰려다니는 단체 관광은 시도해 본 적도 없다. 동창회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대학 다닐 때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 동화리에 가입한 적은 없다. 중학생 때 풍물을 배웠기 때문에 대학교 가서도 장구를 치고 싶었지만 대학 풍물패에 들어가는 건 관뒀다. 선후배 서열 따위를 강요하는 분위기에 포기했다. 다들 시험스터디다 영어 스터디다 모임을 만들어 공부할 때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공부했다. 학교 수업 빼고는 뭐든 독학으로 하는 게 적성에 더 맞았다. 친구 따라 동호회에 한 번 가보고는 나이 성별 학벌 호구조사하며 서열 따지고 간 보는 문화에 질색해서 안녕했다. 물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면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기겠지만 내가 원치 않을 때도 죽을 맞춰야 할 것이고 웃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저당 잡힐 것이다. 매번 정해진 시간에 약속처럼 만나서 웃고 떠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부담감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사실 사람들은 만남이 꼭 필요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요한 자리도 있겠지만 대부분 자리는 별 목적도 이유도 없다. 사교라는 이유가 있어야 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 편한 소중한 벗이 아닌 담에야. 나는 외로운 것보다 불편한 게 더 힘들다. 친한 사람 편안한 사람 말고는 아무나 만나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애써 하하 호호 미소를 띠며 맞장구를 치고 상대의 장단을 맞추는데 내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스몰토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능동형 외톨이, 자발적 고독을 선택한 사람일 것이다. 나 되면 좋은 점은 역설적이게도 진짜 외톨이가 될 확률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외톨이니까 외톨이가 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외톨이는 극복해야 하는 성향이거나 잘못 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다. 비사교적이고 반사회적인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외톨이.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도 현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적인 능력이 아닐까. 몸의 근육량만 늘이는데 겉으로 보이는 데만 신경 쓸 게 아니라 마음의 근육 즉 정신력을 키우는데도 힘을 써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도 그중 하나다.
프리랜서로 살려면 의당 혼자 있음에 익숙해져야 할 뿐만 아니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프리랜서로 산다면 더더욱 자발적 고독을 잘 견디는 능력이 필수다. 모든 예술 장르가 그러하듯이 재능이란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이 있는 자에게 잠시 머문다. 혼자서는 경쟁할 수 없지만 혼자 있으면 경쟁력이 생긴다. 프리랜서는 모든 것을 혼자 고민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에 강해야 하고 동시에 유연해야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비단 프리랜서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강연을 하고 수업을 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혼자 일할 때도 있고 같이 얼굴을 맞대고 일하기도 하고 여럿이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한다. 매번 그때 그때 다르다. 시나리오나 글을 쓸 때는 완벽하게 혼자 일을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여러 명과 수없이 많이 만나고 대화하고 부딪히고 소통하면서 작업한다. 시나리오 작가에서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은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사람이 변해야 한다. 촬영도 혼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성과 통솔력 리더십도 발휘해야 한다.
반대급부로 혼자 일할 때는 최대한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원한다. 삶을 줄이고 줄이는 일상. 일상의 자잘한 소음과 갈등을 배제하고 완벽하게 조용한 삶. 구도자적인 일상. 중심 가치를 위해 다른 것들을 배제하고 포기하고 소거해 나가는 삶. 다른 요소를 줄여다나 가는 삶. 욕망의 크기를 줄이고 관심 분야를 축소해서 가장 단순화시키는 삶.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촬영을 하거나 편집을 하고 영화를 만든다는 행위란 무엇일까.
리뷰나 페북 글 같은 건 음악을 들으며 왔다 갔다 산만하게 작업할 때 더 아이디어가 잘 샘솟지만 시나리오나 책과 같은 단행본을 쓸 때는 무엇보다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글을 쓸 때는 무엇보다 주변 상황이 정리되어 있어야 글이 써진다. 음악조차 전화벨 소리마저 거슬릴 때가 있다.
글을 쓰는 자는 모이면 소문을 만들 확률이 크고 흩어지면 글을 쓸 확률이 크다는 말이 있다.
글은 혼자 있어야 쓸 수 있다는 소리다.
글을 쓴다는 것의 즐거움. 혼자라도 좋은 것.
촬영을 한다는 것의 즐거움. 더불어 창조하는 희열.
창작하는 누구나 봉착하는 문제는 변화다. 지금까지 써왔던 것과 앞으로 써나갈 것을 어떻게 차별화시킬 것인가. 창작자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변화에 대한 강박에 시달린다. 변화하지 않으면 버려질 것 같은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창작자라면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작품에서 지겨움을 느끼는 순간 창작자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생각이 변하면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다른 작품을 낳는다. 어제의 나로 돌아가려는 창작자는 없다.
글을 쓸 때 도취라는 황홀경에 빠지지 않으려 조심한다. 얼마나 건강하게 거리를 두면서 내가 쓴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얼마나 건강한 상태로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술과 마약에 취한 예술가가 일필 휘지로 그림을 그린다거나 명곡을 작곡했다거나 시를 썼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부류가 되지 못했다. 만취하면 다음 날 그다음 날 까지도 무너져서 극도의 자괴감에 시달릴 뿐 글은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한다. 감정의 파고를 오르락내리락 대며 휘청이는 감성이 아니라 마감해 낼 수 있는 지구력과 체력 즉 건강이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휘청거리는 감성으로는 일을 할 수 없다. 대신 내면의 휘청대는 감성은 일상의 즐거움과 소소한 재미와 게으른 직관을 위해 남겨둔다.
프리랜서에게 마감은 일을 추진해 나가는 동력이다. 마감이 있으니까 일을 한다. 스스로를 채찍질해서 한없이 늘어지는 마음과 게으름을 피우는 몸뚱이를 채찍질해서 정신 들게 하려면 마감밖에 답이 없다.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정신이 곧추서고 이제 일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외부에서 주어진 마감이든 나 스스로 정한 마감이든 마감이 없다면 과연 내가 일을 마칠 수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특히나 혼자서 일하는 사람은 누가 자신을 굴려주기를 기다리면서 타성으로 굴러가서는 곤란하다. 알아서 기는 게 아니라 알아서 굴러가야 한다. 관성에 기대고 타성에 젖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가속과 제동을 걸 줄 알아야 한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 남의 평가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제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평점이 낮으면 스스로에게 만족보다 불만이 높아진다. 그러다 보면 열등감이라는 함정에 빠지 지거나 자기 비하에 시달릴 수도 있다. 따라서 잘 굴러가려면 스스로 평가를 잘 내려야 한다. 이렇듯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라는 직업이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그 기준은 실력, 수입, 평판, 자긍심, 만족감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만일 점수가 낮으면 일을 때려치워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점수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선택하기 나름이다. 평가는 남도 하지만 자기도 한다. 마라톤을 뛴다고 생각하면 된다. 인생이란 어차피 희비가 엇갈리기 마련이다. 길고 짧은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다. 사소한 것으로 기분이 엉망이 될 때도 있지만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다짐이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
나는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 시간이 아깝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기에도 이 생이 짧다. 타인의 인생에 객관식 시험처럼 점수를 매기며 우월감과 열등감에 젖느니 내 과거와 현재를 비추어 개선할 점을 생각하는 게 더 낫다. 현재를 충실히 느끼고 미래를 꿈꾸며 오늘을 사는 게 더 즐겁다. 내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다가 괴로워할 시간에 지금 내 눈앞에 빛나는 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