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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도시 산책자의 하루

영화 소공녀의 미소처럼

by 홍재희 Hong Jaehee




캡모자 쓰고 지퍼 달린 후드점퍼에 체육복 바지. 캔버스화 또는 운동화 신고 배낭 멘다. 내가 좋아하는 옷차림. 뭐랄까. 이렇게 입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든다.




프리랜서 노동자 예술인 또는 일명 백수인 삶이 제일 좋은 순간은 이럴 때.


월요일 아침. 종각 무교동 소공동 북창동을 거닐며. 한가로운 도심 풍경을 바라본다.

쉬고 싶으면 쉬고 앉고 싶으면 앉고 걷고 싶으면 걷는다.

산들바람이 불고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잎사귀가 떨린다. 초봄과 초여름. 생이 경이로운 순간.

햇살이 나무를 희롱하며 둘이 추는 춤을 그 빛이 바닥으로 낙하하여 다시 그리는 춤을 바라본다.

반짝이는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숨바꼭질한다.

빛이 나뭇가지를 어루만지고 잎이 사르르 몸을 떠는 순간 빛이 그리는 그림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

하루 종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 태양이 그리는 그림자를 보면 시간이 흘러가는 걸 느낄 수 있다. 시계가 따로 필요 없다.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엄마가 시장에 가고 혼자 집에 남겨져도 방과 후 교실에 홀로 남아 있어도 외롭지 않았던 까닭은 빛이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빛의 물결을 동그라미를 바라보며 넋을 잃었던 기억.

시간만 있다면 여유만 있다면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면 된다. 돈이 없어도 즐길 수 있는 삶. 게으름뱅이의 삶.





책 팔러 알라딘 중고매장 가는 길.


지나가다 일 년동안 여행 중이라 경비가 떨어져 적선해 달라는 젊은 외국인 남자 여행자 한 명과 길바닥에 엎드려 적선을 바라는 노숙인 할머니를 봤다. 순간 둘 중 누구에게 주어야 하는가 갈등하다 할머니에게 지갑에 있는 전재산 현금 오천 원을 건넸다.


알라딘에서 책 네 권을 팔아 만 원을 받았다. 내 지갑 안에는 다시 만 원이 생겼다. 마이너스 인생인데 공돈 생긴 듯 들뜬다.


만 원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일단 나는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그래서 차비를 아낄 겸 이다지도 볕 좋은 날 햇살 가득한 날이니 집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힘들면 따릉이를 타면 되지. 그때 띵똥~ 교통카드 대금을 연체했으니 카드 사용에 제한이 있을 거라는 문자가 온다. 웃음이 나온다. 월세 카드값이 줄을 지어 서있다는 사실이 뒤통수를 낚아챈다.


그러나 곧 이 순간만큼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하늘은 눈부시게 빛나고 나는 이렇게 살아있으니. 어쩌면 삶은 우연일 뿐이고 산다는 것은 선택과 모순 그 자체가 아닐까.


무교동 골목 카페에서 이천구백 원 카푸치노 한 잔을 사서 마시며 문득 지난겨울 멜버른거리에서 만난 여자 노숙인이 떠올랐다. 나는 되도록 남자보다는 여자 노숙인에게 돈을 건넨다. 사회적 약자로서 성과 젠더의 이중 굴레에 놓인 여자가 길에서 사는 것이 더 위험하고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내가 건넨 10불을 받아 들고 백인 여인은 땡큐를 연발하며 이제 담배를 살 수 있다고 기뻐했다. 순간 뭐야…..내가 준 돈으로 담배를 사겠다는 그녀가 어이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녀를 이해했다. 길에서 구걸해 끼니를 해결하는 인생이라도 좋아하는 담배는 피워야겠다는 그녀의 마음을.


그녀와 나는 다르지 않다.


밥 한 끼와 담배를 맞바꾸는 그녀와 책을 판 돈을 내고 맛있는 커피 한잔을 사서 길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나는 과연 뭐가 다른가. 사람은 밥만으로는 살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리석을지언정 내일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보다 현재 이 순간의 구체적 만족이 더 행복한 법이다.


오 천 원을 쥔 할머니가 낙원상가 국밥집에서 한 끼를 먹을지 돈을 더 모을지 아니면 소주를 사 마실지 아니면 나는 모른다. 나는 그의 선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 내가 건넨 돈이 그의 손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그 돈으로 무엇을 하든 그의 선택이자 자유인 것이다. 타인에게 베푼 호의와 친절은 내가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로 결심한 순간으로 기꺼이 우러난 마음 그 자체로 할 일을 다한 것. 호의에 대한 대가와 친절에 대한 보상을 원할 때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 순간 친절의 의미는 변질된다. 그러므로 기대 없이 친절하라.



종각역 5번 6번 출구 사이에는 전봉준 녹두 장군 동상이 있다. 문득 이곳 종각 광화문 곳곳에 대기업 빌딩 앞에서 악덕 지본가를 규탄하며 연좌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이 길바닥에 정좌하고 철의 노동자를 부르던 그들의 모습이 여기 전봉준과 겹친다. 과거 속 전봉준은 이제 여기서 시위하는 우리들 노동자. 그런데 오늘 같은 날. 햇살 아래 그가 몹시 슬퍼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나 하나뿐인가.





우연한 발견. 무교동 귀퉁이 카페에 클림트 그림 복제화가 줄지어 걸려있다. 클림트 하면 떠오르는 작품이 아니라 본 적이 없는 낯선 풍경화다. 봄이 가득한 숲. 꽃이 만발한 연못. 햇살이 가득한 정원이 펼쳐진다. 커피 한 잔 값에 운 좋게 클림트가 그린 풍경화를 감상한다.진품이면 어떻고 모조이면 또 어떤가. 이처럼 즐길 수만 있다면. 이런 카페 아, 좋다.





정류장 벤치를 침대 삼아 이불을 둘둘 말고 잠든 노숙자.

문득 그가 이 도시의 누에고치라는 생각을 했다.

긴긴 겨울을 나고 이제 찬란히 하늘로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며

고치 속에서 잠들어 있는 애벌레.

꿈꾸는 애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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