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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볕이 좋아서

by 홍재희 Hong Jaehee





일하다 가끔 짬이 날 때마다 자투리 시간에 일과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의 책을 읽는다. 뇌과학 진화생물학 인류학 철학 같은 책. 일과 인간관계가 주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랄까. 최대한 일상에서 멀리 동떨어진 다른 것에 집중해서 머리를 써야 하는 복잡한 일과 자질구레한 고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뇌 속을 탐험하거나 진화의 비밀과 블랙홀의 심연에 열중하거나 에로스가 실종된 이 시대를 사유하거나.


차리리 친구를 만나라 수다를 떨고 사교를 하지 그러냐라고 묻는 이들이 있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말씀이다. 사람을 만나는 건 대화를 나누며 상대에게 집중하는 즉 에너지를 외부로 써야 하는 일이다. 가뜩이나 작업에 몰입해야 하는 시기에는 불가능하다. 창작하는 이는 혼자 있는 시간에 에너지가 차오른다. 머리를 비우고 산책하는 도중에 아이디어가 샘솟기도 하는 법이다.




보통 때면 나 홀로였을 공원인데 볕이 좋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한가로운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

말없이 조용조용 숲을 산책하는 노부부의 뒷모습.

아이스커피를 들고 운동기구에 올라타 셀카를 찍는 소녀들.

유모차를 끌고 개와 아기와 산책을 나선 젊은 부부.

얼굴 탈세라 캡모자 나란히 쓰고서 벤치에 쪼르르 앉아 있는 아주머니 셋.

백발노인은 길바닥에 앉아 바람결에 출렁이는 나무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윽고 가방에서 종이컵을 꺼내 막걸리를 들이켜고는 나무 그늘 아래 대자로 누웠다. 지저귀는 새소리 풀빛같은 바람소리 파도치는 숲내음은 자연이 선사하는 술안주.

나 홀로 낮술 한잔에 유유자적 풍류라.....

뭘 좀 아는 즐길 줄 아는 양반이시네.


바라만 봐도 힐링이다.


상상한다.

이들 모두는 각자 어디로 돌아갈까.

어떤 집에 살며 누구로 살고 있을까.

무슨 고민이 어떤 비밀이 있을까.


푸르른 산을 십여 분 동안 지그시 바라봤다.

눈을 감고 햇살을 새소리를 음미한다.

인간은 수백 만 년을 진화해 왔지만 수렵채집인의 DNA를 버리지는 못한 거 같다. 울울창창한 저 푸른 숲만 바라봐도 마음이 정화되는 듯 더러움과 피곤에 찌든 눈이 스트레스가 깨끗이 씻겨나간다.

5층 건물 보다도 더 높은 아름드리나무 아래 서서

이러매 생각한다.

너는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겠지.

사람이 베어내지 않는 한

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이곳을 지키고 있겠지.

이 거대한 나무 한그루가 품고 있을 숭고한 시간의 역사 앞에서

백 세 시대 백이십까지도 살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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