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단상

세상의 모든 낡아가는 것들을 사랑할 때

by 홍재희 Hong Jaehee



조금만 더러워지고 부서지고 낡으면 곧장 버리고 뭐든 새것으로 바꾸는 세상이다. 하물며 집은 더 하다. 누구나 새 집 깨끗한 집 편리한 집에서 살고 싶어 한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새로 지은 신축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로망을 꿈꾼다.


하지만 나는 전혀 다른 미학으로 산다. 내가 사는 집은 아주 낡은 집이라 방치하면 금세 티가 난다. 평소 돌보기를 게을리하면 아뿔싸, 갈라진 벽 틈에서 마른 흙이 스르르 떨어지며 벽지는 들뜨며 곰팡이가 슬고 먼지가 쌓이고 거미줄이 생긴다. 옆 집 꼬부랑 할머니가 당신이 결혼해 이사 왔을 때부터 이미 이 집이 있었다 하니 아마 지은 지 사오십 년은 훌쩍 넘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이런 풍경은 아니었다. 오래된 집들이 늘 그렇듯 낡고 더럽고 지저분했으며 우중충했다. 서울의 60-70년대와 80 -90년대가 고스란히 한 공간에 공존하는 집. 그 옛날 이촌향도 시절,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은 피난민과 이름 모를 노동자들이 불법으로 증축한 집, 건축가도 아닌 평범한 누군가가 그때 그때 주먹구구로 필요에 따라지어 올렸을 낡디 낡은 이 집이 니는 마음에 쏙 들었다. 뭣보다 집세가 전국 최고일 서울 한복판에서 이만한 넓이의 집을 최저 월세에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으므로.





처음 이 집에 놀러 왔을 때 와아...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아?라고 기겁했던 친구가 생각난다. 관리인이 있고 키패드로 문을 여는 오피스텔 신축 빌라에 살던 친구의 미감과 나의 미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네가 이해할 수 있으려나? 아마도 힘들겠지. 집들이에 놀러 온 또 다른 친구는 이 집의 널찍한 발코니에 앉아서 서울 야경을 바라보며 불쑥 이런 말을 건넸다. 꼭 홍콩 영화에 나오는 집 같아. 그 말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찬사였다. 타이베이의 북쪽 신베이토우의 어느 산자락에서 마주한 집, 태국의 치앙마이 아니면 빠이의 어드메 삼층 꼭대기 발코니 같은 집, 비둘기가 구구구 내려앉는 지붕 아래 열쇠로 문을 따는 파리의 어느 다락방을 연상시키는 그런 집.



있잖아. 나는 이런 집이 좋아. 이런 공간을 사랑해. 시간과 세월이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는 곳.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기억을 향수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나는 낡고 오래된 집, 집의 내부 구조가 천방지축 제멋대로인 집, 뭣하나 평범하지 않은 이 집이 비범해서 정말 좋았다. 다른 집과 똑같지 않아서 남들과 달라서 더욱 좋았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나의 숨결과 손길로 살려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떤 집이든 그 집의 현재 모습을 볼 게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꾸미고 살 공간인 보금자리를 상상해야 한다. 처한 환경에 굴복하느냐 마느냐.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돈이 없다면 넉넉지 않다면 시간과 몸으로 때우면 된다. 마음으로 사랑을 주면 된다. 집도 결국 꾸미기 나름이다. 사람도 나이 들고 늙으면 몸 여기저기가 고장 나듯이 집도 마찬가지다. 집도 결국 사는 사람의 손길을 탄다. 고쳐 쓰고 아껴 쓰며 돌보고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다. 인생의 섭리다.



나는 이 집에 살면서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집이 나이 먹고 낡아가듯이 나도 나이 들고 늙어간다는 것을. 사람은 시간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날마다 발코니에 앉아서 사시사철의 구름의 모양이 다르고 바람의 방향이 다르며 빛의 기울기가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노을이 집 안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시간에 빛이 나의 영혼을 따사로이 어루만질 때 생의 감각을 느끼며 깨달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음을 다스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