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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21세기의 생존력은 살림과 요리다

by 홍재희 Hong Jaehee



21세기 2025년 대한민국의 초상.


가족의 저녁은 이미 각자의 저녁이 된지 오래인데...더이상 대가족 문화도 아니고 심지어 핵가족이어도 부모 자식이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는 일은 드물다. TV연속극이나 토크쇼에 가끔 대가족이 등장하여 끈끈한 가족애를 자랑하며 과거에 대한 향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을 반증할 뿐.


TV에서 흥미롭게 관찰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삼시 세끼를 먹기는커녕 한끼도 제대로 해먹기 힘든 도시생활자들에게 '차줌마'를 유행시킨 '삼시 세끼'와 집밥은 엄마밥이 아니라 집에서 스스로 해먹는 밥이라고 정정한 '집밥 백선생'. 미디어를 접수한 가히 대세라 일컬어지는 남성 요리사들의 경연장 '냉장고를 부탁해' 에서부터 '아빠 어디가' '나 혼자 산다' '꽃보다 할배' '오늘 뭐 먹지?' 등등. 비슷한 프로그램이 쉴 새 없이 등장했다 사라진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모조리 도배하는 건 지겨울 정도로 온통 남성, 남성, 남성뿐이다. 누가 보면 세상 한국 남성들이 전부 요리를 잘 하고 육아에 진심이며 살림을 잘 하는 줄 알겠다. 실제 현실 속에서는 남성들은 살림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데. 부엌일은 여자일로 남 일 취급하며 고작 '도와준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남자는 살림에서 여전히 논외로 간주되는 마당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들어 왜 유독 요리, 육아 등 살림에서 남성들만을 관찰한 프로그램이 이토록 인기를 끌까?



곰곰히 들여다보면 이 같은 프로그램이 늘고 있는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먼저 살림은 당연히 여자의 일, 여자몫이라고 여기는 사회 통념상 여성이 주인공인 살림 육아 요리 프로그램은 도통 인기가 없다. (여자라면 누구나 살림을 잘 해야 한다는 성별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따라서 잘 할 수 없기도 하고 못하는 여자도 많다는 사실은 철저히 부정된다.)


한편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삶의 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전통적 남성성이 현대 지식사회의 생산에 기여하는 바가 점점 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옴으로써 가사노동을 면제받고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먹던 가부장의 권리가 무너졌으니 남자들도 이제 밥하는 법을 배워야하고 스스로 살림을 영위할 줄 알아야하며 각자 혼자서 밥 먹는 사회로 변화하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사실이라는 것.


당장 피부로 느끼는 이같은 현실을 이해하면 1인 가구의 급속한 증가와 인생에 닻을 내리고 정박하지 못하는 삶에 대해 좀 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왜 다이소 그리고 이케아가 한국에서 하필 지금 시점에 큰 사업적 기회를 얻게 되었는 지를 알 수 있다. 먹방이 범람하거나 세프가 유명인이 되며 요리 유투버가 인기를 몰고 심야식당과 고독한 미식가 같은 드라마가 유행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함께 양성 평등의 추세는 동등한 인간의 권한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고, 시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제례인 추석 명절이 끝난 직후에 왜 갑자기 백화점 매출이 늘고 이혼율이 급증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언제나 여성은 더 빨리 시대 변화에 적응하며 도전한다. 태생적 조건과 항상적 상시적 차별에 시달리는 여성은 생존 앞에서 더욱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를 여성이 기회주의적이라서 그렇다고 비난하는 남성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말해주겠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무엇을 고집하든 실제와 다르다. 고로 당신이 믿는 상식은 더이상 상식이 아닐 수 있다고.



요리해본 적이 없다거나 밥 해먹을 줄 모른다는 걸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자들을 보면 적이 한심하다.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밥 해먹을 줄도 요리할 줄도 모른다는 사람, 배달음식으로 늘상 때운다는 사람, 아무거나 대충 마구 먹어대는 사람, 살림과 식비에 대한 경제관념이 전무한 사람, 누가 챙겨주지 않으면 스스로를 돌볼 줄 모르는 사람, 자기 관리가 엉망인 사람은 남녀노소 불문 참 별로다. 남자는 1도 매력이 없다. 첫인상이 좋았더라도 오히려 매력이 반감된다. 나는 쓸 돈이 철철 넘쳐셔 괜찮다고요? 네. 가정부와 요리사를 고용하고 파인 다이닝에 오마카세 즐기고 허구헌날 외식으로 펑펑 써도 괜찮을 경제력이 있다면 뭐 그러세요. 꼴리는 대로 사세요. 그런데 돈이 아무리 많은들 죽을 때까지 밥숟가락 챙겨주는 엄마 손이 필요한 그런 남자 (어른이 아니라 나이든 애새끼와 다를 바 없는)와 한 지붕 아래 한 집에서 사는 상상만 해도....... 음... 나는 조용히 거른다.



이제 변화하는 가치관과 시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남자들은 리모컨을 들고 거실 소파에서 혼자 잠잘 수 밖에 없으며 편의점에서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며 만성 피로와 불규칙한 식습관에 몸을 망칠 수 밖에 없다. 남성들조차 상시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마당에 이제 과거와 같은 남성적 권위를 내세워 여전히 가정에서 군림하려는 남성은 철저히 도태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삶을 영위할 줄 모르는 남성, 밥 해먹고 요리할 줄 모르는 남성에게 고립사는 따논 당상이다.



자신의 일상을 돌보는 살림은
(상별 젠더 불문)
일상의 기본값이자 생활력이자 생존력이다.



아직도 날마다 여자가 차려주는 따끈한 아침 밥상을 받고 싶고, 아내가 해주는 세 끼 밥을 먹고 싶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면, 제 앞가림 할 수 있는 나이를 먹고서도 세상 모든 여자들에게 밥 먹여주던 제 엄마를 기대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에게 말해주겠다. 이제 그 여자는 당신 어머니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아니, 당신의 엄마조차 생계를 책임지고 가족을 돌보고 먹고 사느라 제 끼니도 챙겨먹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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