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무상을 느끼며
학교 동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ooo의 부고.
6월 6일 숙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장례식장은 여수제일병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00 많이 아팠거든. 아팠던 거 알지?
- 그동안 다 나았던 거 아니야? 투병 중이었던 거야?
- 응. 아파서 여수 내려간 지 오래.
문득 눈앞에 영화학교 시절의 그가,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불러젖히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영화판을 배회하던 시절의 그가,
모 영화사 앞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가 아파서 한동안 작업을 못했는데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다고 환하게 웃던 모습이,
나직한 중저음의 바리톤 음성으로 그런데 너는 요즘 뭐 하고 사니?라고 묻던 그의 목소리가.
나는 학교 중정에서, 잔디밭에서, 강의실에서, 지하 편집실에서, 학생식당에서,
고등학교에서 합창반을 했다던 한 때 성악에 뜻을 두었다던 그가 목청껏 불렀던 '송어'를 기억한다.
그에게 목소리를 앗아간 후두암이라니. 생은 얼마나 잔인한가.
친구는 여수에 당일치기로 장례식에 들리겠다고 했다.
나는 수업에 알바에 회의까지 잡혀있어서 갈 수가 없다.
마음이 심란해졌다.
- 진짜 이제 누가 먼저 가도 이상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구나. 우리는.
- 응. 내 말이. 기분이 정말 그래. 그래서 앞으론 무조건 놀 건 논다는 마음으로 살려고.
- 그래. 언제 죽어도 내일 죽을 수도 있는 게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니.
- 나 그래서 운동도 하고 해외여행도 지른 거심. 올여름에 핀란드 가려고.
- 그래.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가는 거야. 다리가 떨릴 때가 아니라. 다리가 후덜 거리면 놀고 싶고 가고 싶어도 못 가.
- 올 겨울이나 내년엔 남반구 호주도 갈 거야.
- 그래. 나중에 가야지 하면 못 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채팅창을 닫은 후 잠시 생각했다.
해마다 봄에는 이 벚꽃을 살아서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
어제는 광화문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산들바람을 맞으며
솟구치는 분수 사이로 까르르까르르 비눗방울 같은 웃음을 흘리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토록 찬란한 초여름 오후를
바람결에 흩날리는 찰나의 행복과
한 잔의 카푸치노와
따스한 사람의 음성을
살아서 얼마나 더 자주 느낄 수 있을까.
이 순간이 하루하루가 소중해서 눈물이 났다.
오늘 내가 죽고 내일 네가 죽고 어느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삶인데.
우리는 종종 삶이 거저 주어진 것으로, 목숨이 영원한 것처럼 여기고 산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서 생을 감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생이 준 선물에 불과한 것인데.
어쩌면 삶은 우연이 우리에게 선사한 축복에 불과한 것인데.
오늘 나는 하루를 더 살고 이제 당신은 흔적도 자취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구나.
지저귀는 새소리 사이로 하굣길 학생들의 웃음소리 너머로 삶과 죽음이 오고 간다.
아, 아, 아.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눈을 감은 그가,
태초에 우리가 왔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외롭지 않기를.
잘 가요. 이제 그곳에서 편히 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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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 에고이앙의 영화 <클로이>를 수놓았던 캐나다 밴드.
Raised by Swans
이들의 음악을 듣는다.
잠들지 않는 도시. 명멸하는 네온. 그 불빛 아래.
수만 개의 눈동자. 수만 개의 슬픔과 수만 개의 고독이 떠돌 때.
심란하던 마음이 깃털처럼 낙하한다.
마음속 깊이 검푸른 호수의 심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