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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생긴 그대로 타고 난 대로

by 홍재희 Hong Jaehee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전철을 기다리다가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야구모자.

문득 수년을 잊고 산 기억의 방에 달칵 불이 켜졌다.

불쑥 귓가에 맴도는 한 마디.


"넌 지금 입고 있는 대로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야."


스물네댓 즈음인가 학창 시절 좋아하던 친구와 소식이 끊겼다가 우연히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런데 친구는 사회에서 처음 만난 그날 느닷없이 나를 신당에 데리고 갔다.

무당이 그네를 수양딸 삼아 서로 가까이 지내던 사이라 했다

친구는 무당을 신엄마라 불렀다.

철이면 철마다 때마다 신엄마를 찾아가 제단에 쌀을 바치고 햇과일을 올리곤 했는데

그 날도 마침 신엄마를 보러 가는 길이었고

날 만난 김에 함께 신당에 가기로 한 것이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지만 그 친구는 뭐든 남과 다르고 기대를 배반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친구가 나는 좋았다.


만나자마자 당집에 가자는 친구의 말에 뜨악해져서 나는 얼결에 물었다.


- 너 점 보러 다녀? 무교 믿는 거냐?

-하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좋아서 여기가 편해서 오는 거야. 넌 별로니?

-아니 그냥…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사실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호기심이 일었다.

대학 다닐 때 민속학과 무교에 관심 있어 수업도 들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친구는 햇과일과 쌀을 올리고 치성을 드렸고 나는 한 쪽 구석에 엉거주춤하게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절을 마치고 친구는 신엄마에게 새해 신년 운세를 봐달라 응석을 부렸다.

무당은 친구에게 점을 봐주고는 내 쪽을 빤히 쳐다봤다.

너도 볼 거냐 아니냐라는 무언의 눈빛.

나는 복채가 없어 점은 안 보겠다고 뒤로 뺐다.

그러자 친구가 내게 눈을 찡긋하더니 신엄마인 무당에게 내 점을 봐달라 졸라댔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애예요.

졸업하고 기적처럼 다시 만난 거예요.

그러니 절 봐서 한 번 봐주세요.


친구는 나를 재촉했다. 그러지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빼지 말고 말해 봐.


무당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로 얼굴을 돌렸다.


-자, 그래 뭘 알고 싶은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는,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그 시절.

안갯속의 풍경처럼 모든 것이 희미하고 파도처럼 요동치며 숨 쉬는 것조차 불안했던 그 시절.

삶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그 끄트머리를 잡고 정처 없이 부유하던 스물넷의 내게는 절체절명이었던 그 질문.


-전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만신은 무심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만신은 소반 위에 쌀을 또르르 굴렸다.

그리고는 먼 데 창 밖을 보며 한 마디를 읊조렸다.


- 음…. 지금 그 옷 입은 대로 그렇게 입고 살게 될 거야.


그러더니 만신은 흩어진 쌀을 한쪽에 모았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엥?

그게 다예요?

만신의 말은 정말 그게 다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

그 순간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둘러봤다.

청바지에 티셔츠 야구모자 그리고 배낭을 둘러멘 내 옷차림을.

속으로 비웃었다.

뭐야?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이렇게 입고 산다고?

코웃음이 나왔다. 그런 말은 지나가는 개도 하겠다.

김이 팍 샜다. 그래도 나름 뭔가 기대했는데 만신의 대답은 싱겁기 짝이 없었다.

실없는 소리라고 복채를 안 내서 장난하는 거라 생각했다.




해가 지나고 나이를 먹고 나는 만신도 친구도 까맣게 잊었다.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내가 촬영장에서 청바지와 티셔츠 캡 모자를 쓰고 기자재를 나르고 있을 줄은.

이렇게 입고서도 사람을 만나고 일하고 돈을 벌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삶을 살 거라는 뜻이었음을.

매일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을 하게 될 거라는 것을.



무당이 해준 말은 맞았다.


세월이 흐르고 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정말로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아아, 천만다행이다.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생긴 그대로 타고 난 대로 사는 삶.

그럼 됐어.

더 바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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