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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경리단의 추억

by 홍재희 Hong Jaehee


경리단. 이태원 옆에 붙어서 십여 년 전 갑자기 입소문이 퍼지며 온갖 매체에 소개되더니만 세간의 인기 명소가 되어버린 동네. 시쳇말로 떴다!라고 하나. 지금은 유명세를 바로 길 하나 옆 동네 해방촌에 넘겨두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망리단길 용리단길 등등 무슨 무슨 -리단길의 원조, 시초, 시작이 되었던 경리단길.


벼락부자들이 그렇듯 경리단이 알려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부동산이 널뛰기를 하기 시작하더니만 젠트리프케이션이라 일컬어지는 임대료 과열 조짐이 불어닥쳤다. 광풍이었다. 그저 조용한 동네였던 경리단이, 주민들과 거주 외국인이 이웃하며 살던 작은 동네, 놀거리 볼거리 없는 거리에 소소한 가게와 조그만 식당이 올망졸망 자리한 동네가 돈독에 오른 투기꾼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주말만 되면 경리단은 인파로 시끄럽고 피곤해졌다. 가깝고 친근했던 단골 식당들이 문을 닫고 쫓겨나고 치솟는 임대료와 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 둘 경리단을 떠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귀갓길 술 한잔 딱 걸치고 싶어도 변변한 술집 하나 없어 불평을 늘어놓았던 시절도 옛말. 새벽녘 지친 몸뚱이를 이끌고 경리단 언덕배기를 오르던 일상도 옛날. 해방촌 친구네 옥탑에서 고기 구우며 석양을 지켜보던 기억도 가물. 친구, 친구의 친구, 국적 불명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 떼로 함께 음악 틀고 술 마시고 어울렁 더울렁 날 새는 줄 모르던 시절도 안녕. 빈 술병이 늘어날수록 그와 나의 호주머니는 점점 가벼워졌지. 마음도 날아갈 듯 가벼워졌지. 친구가 하던 술집은 이미 망했고 그 시절 함께 한 사람들은 이제 여기에 없다. 그 자리에는 인형뽑기 가게가 들어섰고 돈가스집이 생겼고 포차가 생겼다. 들리던 카페는 간판이 달라졌고 주인이 바꿨다. 철물점이 없어지고 미용실이 문을 닫고 그리고 여기도 편의점 저기도 편의점 고개를 돌리면 사방에 편의점. 십 년도 채 안 되는 세월에 사람도 떠나고 공간도 사라지고 공기마저 변했다.

상실은 그리움을 부른다. 이 길목이 저 골목이 저 집집이 나를 조용히 불러 세운다. 그리고 속삭인다. 아아, 경리단 이태원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그 시간이 자꾸만 그리운 거라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은 문득문득 과거에 사로잡히는 거라고. 추억할 것이 많아진다는 것 혼자서만 기억할 세월이 늘어난다는 거라고. 그리하여 이미 지나가 버린 것, 떠나간 것, 잃어버린 것이 가슴에 사무친다는 것이라고.


예뻐지고 깨끗해지고 어려지고 발랄해지는 경리단. 구경하러 놀러 온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주말 풍경이 낯설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그게 싫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 이곳은 단지 풍경이거나 명소가 아니었음을. 적어도 내게 이곳은 삶이었으며 살림이었으며 한 편의 서사였음을 기억한다. 내가 살아온 역사, 이야기가 없는 곳은 내게 더 이상 고향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나에게 피가 돌게 하는 영혼의 허파, 어찌할 바 모르고 잃어버린 향수. 속정없이 떠나가 버린 사랑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낸 옛사랑.



초여름 오후 경리단. 친구 가게에서 넋 놓고 앉아 있었다. 그때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은 경리단 삼대. 멋들어진 카페, 이국적인 빵집 앞에 아아 저 분홍! 꽃분홍이라니! 그렇지.... 이게 경리단이지. 그렇지.... 이게 이태원이지. 세련되고 쿨한 경리단이 아니라, 세련미와 촌티, 성스러움과 속스러움, 이국적인 것과 아닌 것, 그 둘 사이에 뭔가 균열이 분열이 있는 곳.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중심과 주변이 일탈하면서 공존하는 풍경이 바로 이곳이지. 낯선 이가 외롭지 않고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그런 곳이지. 그래 여긴 '경리단길'이지 가로수길이 아니란 말이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안도감이 들었다. 오래간만에 친구와 나는 동네 삼대 이야기꽃을 피웠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또한 변치 않는 사람이 있으니 흐르는 강물처럼 떠도는 자를 위해 여전히 문을 열어두는 곳이 있으니. 사막에 숨어 있는 오아시스. 기억과 상실의 데자뷔. 누구든 찾을 수 있으나 아무나 사랑할 수는 없는 해방구, 이곳. 영혼이 근질근질해진다.


그곳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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