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1일 시작하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그 해 여름.
6,7,8 월 석 달간 병실에서 여름을 났다.
에어컨 빵빵한 병실 생활이라 더운 줄도 모르고 지난여름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입출입을 철저히 통제한 대학병원.
간병 보호자는 PCR 테스트를 주기적으로 해야 했고 24시간 마스크를 쓰고 지냈다.
어머니의 간병인이자 병실보호자로
간이침대에서 먹고 자고 눕고 돌보는 하루의 연속.
석 달 동안 어머니가 잠든 사이에
찬찬히 써 내려간 일기를 다시 읽는다.
간간히 숨을 돌릴 때 듣는 음악과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산책이 주는 즐거움.
뭣보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나는 그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글쓰기는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오늘을 살고 내일을 맞이할 힘을 준다.
몸을 돌보듯 마음을 보살피는 데는 글쓰기만 한 게 없다.
모두가 잠든 밤.
글을 쓰면서 나는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내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과 흔들리는 내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나를 남처럼 제 3자로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달래며 위로했다.
병동은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 이따금 어딘가 어느 병실에서 섬망으로 고함을 치는 노인의 목소리가, 통증에 몸부림치는 비명소리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낑낑대는 강아지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땅 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용암 끊는 소리 또는 아이고 아이고 하며 허공을 떠도는 유령의 곡소리 같기도 하다. 우리 병실에서도 할머니 환자들은 어김없이 수술 후 일시적 섬망을 겪었다. 어머니도 마취에서 깨어난 후 당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병실이 당신의 집인 줄 아셨다.
어머니가 누워있는 병동은 척추 수술한 고령 환자가 태반이다. 환자들은 병상에 누워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소변줄과 똥기저귀를 찬다. 어머니 병실은 복도 끝쪽에 있기 때문에 물을 받거나 씻거나 똥오줌을 버리기 위해선 복도 반대편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 날마다 소변통과 똥기저귀를 들고 오염처리실을 시계추처럼 왕복하면서 다른 병실을 종종 들여다본다.
척추수술 후 누워있는 환자들은 어머니 연배 거나 그 이상 여하튼 남녀 할 거 없이 거의 일흔이 넘은 노령 환자다. 개중에는 코에 줄을 넣고 숨만 붙어있는 노인, 산소통을 달고 누워있는 노인, 산송장처럼 뼈다귀만 남은 노인도 있다. 척추수술 환자 중에는 암 고혈압 당뇨 천식 치매 등 각종 지병을 복합적으로 달고 있는 환자도 많다.
사람이 늙으면 가장 먼저 망가지는 데가 허리라 한다. 퇴행성 관절염 척추협착증 골다공증. 어쩌면 이 병은 늙음이 몸으로 발현되는 질병, 슬프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노화의 자연스러운 운명인지도 모른다.
새벽녘 졸린 눈을 비비며 어머니의 기저귀를 버리러 가는 길. 간호사실에 섬망으로 난동을 부려 나무토막 같은 팔다리가 꽁꽁 묶인 채 침대에 누워있는 한 노인을 본다.
검버섯이 피어오른 파뿌리 같은 얼굴로 눈도 못 뜨고 코에 호흡기를 달고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린다. 병실에서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영상실에서 사방 곳곳에서 수없이 스치는 고령 환자들의 얼굴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삶과 죽음에 대해 존재론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저 누워 있는 몸뚱이는 살아있는 것인가. 저리 누워 있는 노인은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스스로의 의지로 떠나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온갖 기계장치에 매달려 목숨을 연명하는 삶은 과연 삶인가. '살아있다'는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는가.
빈 집에서 홀로 죽은 독거노인의 죽음을 두고 '고독사'라고 한다. 하지만 그 죽음은 병실에서 죽음을 지연시킨 대가로 산송장으로 사는 삶에 비해 오히려 최소한 인간으로서 존엄은 지킨 죽음은 아닐까. 병원비를 내는 자식이 있어도 24시간 지켜주는 간병인이 있다한들 병실에 누워 약물의 힘을 빌어 통증과 사투를 벌이며 호흡기에 지탱하여 숨을 쉬고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다 명을 다하는 죽음이란 오롯이 그 혼자만이 치러내야 할 더더욱 독한 고독은 아닌가.
어릴 적 늙고 병든 부모를 자식이 산에 데려다 놓고 내려왔다는 고려장 이야기를 배은망덕이고 불효라 배웠다. 그런데 나이 드니 관점이 달라진다. 내가 늙어서 노인이 될 때를 떠올리니 더 그렇다. 늙고 병든 노인인 나를 생각한다. 때가 되어 노인성 질환에 시달리며 통증에 밤잠을 못 이룰 때면, 노인인 내가 내 한 몸을 내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고 밥 숟가락을 떠먹지 못하고 몸을 씻고 닦지 못하고 스스로 똥을 싸고 치우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개나 고양이도 늙어 죽을 때가 오면 먹기를 거부하고 굶는다. 굶으면 어떤 유기체나 할 거 없이 죽는다. 생명이 다해가는 늙은 개체는 더 빨리 죽는다. 무한증식하는 암세포조차 외부에서 영양이 공급되지 않으면 사멸한다.
몇 해전 뇌종양이라는 지병이 있었던 큰 이모님의 딸, 일흔한 살 사촌 언니는 스스로 굶어 죽기를 선택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거기서도 영양제 수액 투여를 거부하고 굶어 죽었다. 스스로 삶을 마감할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나 역시 선택하라면 연명치료를 거부하겠다. 호흡기를 비롯한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 소변기를 찬 채 누워 병실 천장을 바라보며 서서히 죽어가는 대신 집에서 홀로 굶어 죽는 죽음을 택하고 싶다. 그 편이 훨씬 깨끗하고 깔끔하며 품위 있다고 생각한다. 병실이 아니라 집에서 죽는 것이 천운이며 행운이며 지복이라는 것을 이곳에서 재확인한다. 그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항상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죽음은 누구나 혼자 맞닥뜨리고 혼자서 치르는 실존적 체험이다. 더도 말고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스스로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사람으로서 존엄을 지키는 길이다. 때가 되어 적당한 시기에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하면 노년이 더 이상 불안하지 않다. 막연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도 똑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하리라. 의지와 정신이 살아있을 때 주저 없이 선택하리라.
누구나 홀로 죽는 백세 시대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잘 늙는 삶은 무엇인가가 그동안 나의 화두였는데 이제 화두가 하나 더 늘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적극적으로 죽음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