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나들이
나만의 생각일까. 덕수궁은 화장실 햇살마저 눈물 나게 아름다웠어... 빛. 소리. 풍경. 그리고 기억이 추억으로 되돌아오는 곳이었어... 난 화장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어. 빛이 시간에 스며들어 공간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빛이 사라져야 빛의 존재를 깨닫는 법. 오늘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경계가 사라진 잿빛 하늘 아래 그림자 없는 세상. 들뜬 마음이 깃털처럼 소리 없이 가라앉고 있어.....
영글어가는 가을 한 자락을 잡고서 그리운 사람에게 줄 꾸러미를 들고 그네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여행은 마음속의 풍경. 나는 언제나 마음을 여행하는 인간(Homo Viator)이고 싶다. 이 가을처럼 서서히 스며들고 싶다.
트레인의 <Hey, Soul Sister>가 흘러나온다. 길 떠나는 방랑자 나그네를 위한 노래. 헤이 소울 시스터 ~~ 우쿨렐레 리듬에 그네의 연주실력이 늘었을까 궁금해졌어. 투나잇 헤이헤이헤이~
어릴 적 학창 시절 덕수궁은 사생대회 단골 장소였다. 석조전 분수대 둘레에 학생들이 여기저기 퍼져서 덕수궁 곳곳을 그렸던 기억. 날도 더운데 땡볕 아래서 그때는 왜 이런 걸 하나 귀찮고 짜증 나서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빌거나 친구들과 딴짓하기 더 바빴다.
덕수궁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진 수년이 흘러야 했다. 어른이 되어 혼자 거니는 산책의 맛을 알고 나서야 고궁의 미가 눈 안에 가슴에 들어왔다. 정동길 역시 그러하다.
영국 대사관 사이 덕수궁 돌담길이 개방되어 누구나 산책할 수 있게 되었다. 여름 한철 대사관 담 아래 능소화가 눈부시더니 이제 배롱나무 꽃잎이 떨어져 점점이.
밥집 골목 사이로 뒤켠에 소담하게 서 있는 덕수궁 중명전에 들려볼까 했는데 아차차, 문 닫는 시간이 지나버렸다.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린다.
나이 먹어서 좋은 점 하나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된 것. 멈춰 설 줄 알게 된 것. 소소한 길목 술집. 삼삼오오 손님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저녁을 먹는 풍경을 바라본다. 따스하다. 느긋하게 정동길 밤공기를 만끽한다. 취한다.
정동극장 지나 정동 아파트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이곳엔 누가 살고 있을까. 복잡한 도심 번화가에서 살고 싶지도 않고 아파트라면 학을 떨지만 희한하게도 여기 정동아파트만큼은 한 번쯤 살고 싶다는 맘이 든다. 창틀에 놓인 화분마저 맵시 있다. 알뜰살뜰한 풍경이 정겹다.
예원학교 이화여고 창덕여중을 지난다. 시나브로 옛 생각. 중 3 때 고교진학을 앞두고 함께 놀던 친구들은 모두 계성 숭의 이화여고로 나만 달랑 떨어져 무학여고로 배정받았다. 약 오르고 서운하고 황망하고 화났다. 무학이라니 이름도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식탁보 아니면 당구장 커튼을 잘라 만든 것처럼 참을 수 없이 촌스러웠던 무학여고 교복. 그에 비해 산뜻하고 날렵한 이화여고 교복은 얼마나 이뻤던지. 친구 따라 이화여고에 왔을 때 고풍스럽고 예쁜 교정이 몹시 부러웠던 기억이 새록 새록새록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곳은 그윽하니 참말 곱구나.
가을이 보름달을 품어 바다처럼 부풀어 오를 때 정동야행 축제가 열린다. 그때 다시 한번 발걸음을 할까나. 미처 아쉬운 마음을 돌담 아래 은근히 묻어두고. 정동길 한 바퀴 돌아 다시 덕수궁 길목으로. 시청역 길섶 포차에서 천 원짜리 핫도그를 먹는 거로 마무리. 추억의 맛. 학창 시절 먹던 그대로 케첩 왕창 뿌려본다.
석조전에서.
빛이 멈추어 서면 풍경이 되고 시간이 머문 자리에 그림자가 있다.
상상한다. 백여 년 전 이 자리에 서서 석양을 바라보았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아바마마의 손을 꼭 잡고 어리광을 부렸을 덕혜옹주를 흰 적삼 휘날리는 무희들 사이로 눈동자를 반짝이던 궁녀 리심을 로서아 불란서 영국 미국 공사 대사들의 웃음소리 풍악소리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아래 대한제국의 슬픈 운명을.
땅거미 지는 덕수궁에서 양탕국.
전시 순례를 끝내니 궁궐 처마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덕수궁에 올 때마다 의식처럼 치르는 일과. 궁궐 안 운치 있는 찻집 돌담길에서 고종황제께서 즐겨 마셨다던 양탕국(커피)을 한 잔 시켰다. 집에서 싸간 포도알을 입에 넣는다. 해저무는 하늘 바라보며 음풍농월. 어둠이 처마 위에 날개를 접어 내리니 가로등이 하나둘 감은 눈을 살포시 뜬다. 궁궐에 아스라이 불빛이 자리를 편다. 어둑어둑한 밤길 고궁 산책. 쓸쓸하면서도 호젓한 밤이다.
덕수궁 입장료 1천 원. 양탕국 3500원. 핫도그 1천 원으로 반나절 나들이를 갈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