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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단상

나이 들수록 기분 째지는 삶

by 홍재희 Hong Jaehee



초등학교 때 일이다. 방과 후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가을 운동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감독하던 체육 선생이 날 불렀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하는 말이



“야, 반장. 여기 담배 한 갑 사와!”


야?……!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모르겠다. 반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딤배 심부름을 해야히다니.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야! 라니. 하기 싫었다.


“싫어요.”


못 사 오겠다고 담배는 선생님이 직접 사서 피우세요. 선생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체육 교사는 어쭈!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어디 감히 선생한테 대드냐며 내 머리를 툭 쳤다. 어, 쳤어? 그 순간 치가 떨렸다. 돈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냅다 교실을 향해 튀었다. 뒤통수에 야! 쟤 반장 잡아와! 하는 소리가 꽂혔지만 차마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돌아보는 순간 겁먹은 내 얼굴을 들킬 것 같았으니까. 선생에게 목덜미를 잡혀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았으니까. 잠깐, 그 일로 엄마가 학교에 불러왔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빈교실로 후다닥 도망쳐서는 분에 못 이겨 책걸상을 발로 우당탕 차고 넘어뜨린 것만 기억난다. 의자를 내던지며 씩씩대며 분풀이를 하고 있는 날 보고 부반장이 멍하니 서있던 모습도.


어른들은 평소에 말 잘 듣고 시키는 거 잘하는 착한 애라 여겼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싫다 하지 않겠다며 버틸 때마다 환장을 했다. 부모에게나 선생에게는 나는 다루기 어려운 밉상이었다. 그런데 그건 부모와 선생들의 착각이었다. 이보세요. 댁들이 시키는 대로 말 잘 들은 게 아니라 그건 내가 좋아서 한 거라고요. 난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누가 뭘 시켜도 상관없이 신나게 했지만 하고 싶지 않을 때 누가 뭘 시키면 안 한다는 의사표현이 분명했을 뿐이다.



말끝마다 “싫어요.”를 연발하는 자식 때문에 무던히 속을 끓인 어머니. 어머니는 그런 날 두고 아홉 번 잘하다 꼭 한 번 고집을 부려 욕을 먹고 매를 번다며 용두사미라고 내 탓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울분을 삼켜야 했다.


“하기 싫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체벌도 많이 받았다. 사랑과 훈육의 매라고? X까시네. 내 앞에서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인간이 있으면 죽여 버린다. (아, 농담이다. 물론 상상 속에서만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모난 정이 돌 맞는다'라는 말도 숱하게 들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돌 던지면 그거 폭력이에요. 체벌로 사랑을 전달하고 교육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무지하거나 변태이거나. 서열과 위계로 권력이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벌어지는 체벌은 결코 사랑일 수 없다. 어떤 식으로 미화하든 폭력일 뿐이다. 이론적으로 철저히 수평적 관계인 두 성인이 쾌락으로 합의한 SM이 아닌 한.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다. 다시 돌아가자.


나이와 무관하게 사람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가장 즐겁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면 시간이 죽어라 안 간다. 좋아하는 걸 하면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덜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곤해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는 너무 많으니 그게 아이러니다. 맞다. 나이 들수록 제가 하기 싫은 게 뭔지만 정확히 알아도 하기 싫은 것만 안 해도 인생 절반은 편하게 산다. (여기서 편하다는 건 돈 많아서 으스대면서 문명의 이기로 편리하게 산다는 의미가 아닌 것쯤은 다들 아시겠지요?) 속 편하고 스트레스 안 받는다는 소리다.


어릴 적부터 내가 부모든 선생이든 남들에게 제일 듣기 싫었던 소리이자 지금도 여전히 싫어하는 말.


“사람이 하고 싶은 거만 하고 어떻게 사냐? 먹고살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거야.”


글쎄. 하기 싫은데 억지로 참고 평생 살다 보면 스트레스로 화병에 암 걸려 후회하다 죽는다. 먹고 사려니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면 하고 싶다로 생각을 바꾸던가 그게 안 되면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 먹고사는 게 문제라도 너무 하기 싫으면 차라리 먹고사는 방식을 바꾼다. 정말이지 하기 싫은 거 안 하면 기분 째진다. 반대로 하지 말라는 거 해도 기분 째진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내가 가장 하기 싫은 건 뭐가 있을까 곰곰이 짚어본다. 부모가 선생들이 강압적으로 억지로 시키는건 하기 싫었다. 그래서 안 했다. 졸업하고 회사 다니고 직장 다니는 건 하기 싫었다. 그래서 안 했다. 결혼해서 애 낳고 사는 삶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안 했다. 돈과 물욕 성공에 미친 인간으로 살기 싫었다. 그래서 욕심을 버렸다. 남들과 똑같이 사는 건 무엇보다 가장 싫었다. 그래서 그런 똑같은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산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죽고 싶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나날이 많았어도 점점 나이 들수록 기분 째지는 괜찮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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