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단상

동지 섣달 팥죽 아버지

by 홍재희 Hong Jaehee

1.


늦은밤 연락이 왔다.




쌀을 불리고 팥을 쑤고 푸고 담고 새알심을 굴리기를 반복하면서 11시간을 넘게 팥죽을 만들었다 했다.

그 팥죽을 준다고 차를 타고 오겠다 했다.

울컥했다.

올여름 아버지의 49재를 절에서 올려준 이다.

그이가 이번에는 팥죽을 들고 나타났다.


어머니가 물었다.

아버지 49재 올려준 그 분이니?

네. 바로 그 친구에요.

정말 좋은 사람이구나.

들렸다 가시라 해라.

시간이 너무 늦어서 주고만 간대요.

다음에는 꼭 올라와서 밥 먹고 가라 해.

네. 그럴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49재를 한 번 올리자 했는데

동생이나 나나 말뿐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랬는데 어느 날 그가 나 대신 절에 아버지 이름을 써서 올렸다 했다.

긴 세월 동안 아버지를 잊고 그토록 무정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고 본인의 사정도 힘든데 객에게도 마음을 써준 그가 몹시 고마웠고 또 미안하고 미안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받았는데

그랬는데

이번에는

그가 곱게 쑨 팥죽을 손에 들고 찾아온 것이다.



떠나는 그의 차를 배웅하면서 돌아서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무슨 인연인걸까.

아버지가 보내주신 귀인인걸까.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가 건네 준 팥죽은 마치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올리는 축원

49 재를 받은 아버지가 그를 통해 우리 먹으라고 보내준 선물같다.


동지섣달 팥죽 그리고 아버지.

그리고 49재를 올려주고 팥죽을 만들어준 그대.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2.


오늘은 동지. 내일부터 밤이 눈싸라기만큼 점점 더 짧아진다. 동지를 지난다는 것은 한 해가 끝나간다는 것이며 막을 내린다는 뜻이다.



아버지 기일이다. 해서 하루 전 오늘 저녁 간단히 식구들이 모인다. 12월 23일 아침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는데 아,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벌써......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저 꿈결만 같다.


해마다 이맘 때면 밖으로 싸돌아 다니는 게 아니라 집에서 기일을 챙기는 게 일과가 되었다. 연말 크리스마스만 되면 해외로 짐을 싸서 날아가거나 흥청망청 날밤 새워 놀아제꼈던 날 멈춰세운 건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다.



연말은 항상 크리스마스 캐롤과 그 춥던 겨울 눈발과 벽제 화장터가 오버랩된다. 크리스마스 아침. 나는 화장터로 떠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배웅했다. 발인하던 날 12월 25일. 큰 눈이 내렸고 세찬 눈발을 헤치며 달리던 영구차를 떠올린다. 메리 크리스마스. 노엘 노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버지의 육신이 한 줌 재로 화하고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남긴 마지막 흔적, 한 때 아버지로 불렸던 뼛가루를 납골당에 안치하고 나온 날 하늘은 눈이 휘날렸고 몹시 추웠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게 연말은 술과 송년회와 캐롤보다 레퀴엠의 냄새가 자욱한 한 달이다. 삶과 죽음의 달. 12월. 메멘토 모리.



오랜 세월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 세상을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걸었던 그 시절의 당신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 날이 갈수록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점점 젊어지고 나는 점점 더 늙어갈 것이다. 이제 내게 아버지는 어쩌다 한 번씩 떠오르는 사람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니 미움도 그리움도 희미해져간다.


인생무상. 모든 것은 사라져갈 뿐이다.


3.


아버지.


살아계신다면

아버지와 소주 한 잔 나누고 싶어요.

소주 한 잔으로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그 고독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덜어드리고 싶어요.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던 당신의 어깨가 얼마나 가날프고 슬펐던지요.

그 때는 미처 당신의 손을 잡아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고독 당신의 고통 당신의 슬픔

삶의 무게를 짊어진 사내들의 외로운 뒷모습

굽은 등짝 처진 어깨에

오늘도 저는 마음이 저려옵니다.

시절인연 스치고 지나가는 사내들 얼굴에서

저는 아버지 당신을 봅니다.

소주로 시름을 달랜 아버지처럼

소주를 좋아하는 친구와

아버지의 미소를 닮은 그이와

소주 한 잔을 나눌게요.

그리고

아버지가 살리고 돌보고 아끼고 사랑한

아버지의 딸인 저는

이제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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