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단상

헌책방의 추억

경리단의 터줏대감

by 홍재희 Hong Jaehee



경리단 살 때 매일 오다가다 지나간 헌책방. 애인과 들러 즐겁게 헌 책을 탐험하던 시간이 떠오른다. 누렇게 변색된 낡은 책을 뒤져보는 재미. 영어 포켓판을 사거나 여행 떠나기 전 론니 플래닛을 싼 값에 사서 배낭 속에 집어넣고 길에서 다시 돌아와 되팔았던 추억. 여기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때운 기억이 소소한 즐거움으로 남아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 중에 이화유 영어회화책이 두 권 있다. 위편삼절. 그 옛날 아버지가 영어를 배우겠다고 마르고 닮도록 읽고 또 읽은 회화책이다. 어린 시절 내게 영어를 배우라며 이화유 회화책 한 권이면 다 된다고 하셨던 아버지. 하지만 나는 거들떠도 안 보고 관심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챙겨 와 집 책장에 고이 꽂아놓았다. 아버지가 이승에 남기고 떠난 책은 이 영어회화책과 영어판 꾸란이다. 종이로 곱게 표지를 싼 책은 오래되어 너덜너덜해졌지만 이 책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포린 북 스토어 헌책방을 지나다 보면 자꾸만 아버지가, 아버지의 영어책이 생각난다.


외국에 갈 때마다 나는 그곳 도시의 서점과 헌책방에 꼭 들리곤 한다. 그때마다 부러운 것은 그네들이 사랑하는 중고 헌책방이다. 언젠가 파리에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헌책방에 갔을 때 기억이 난다. 책방 주인은 처음 서점 문을 연 사람이 이미 아니었다. 전주인에게서 이어받고 또 이어받아 그때 그 이름 그대로 책방을 지키고 있는 현재 주인. 책방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단지 오래된 책만이 아니었다. 2차 대전 시기에도 책방 문을 열었다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과거. 현재 책방 주인은 바로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2019년 여름 아이슬란드 캠핑을 갔을 때다. 동행한 캠핑 친구들이 모두 한국으로 떠나고 나는 홀로 레이캬비크에 남았다. 온전히 혼자서 도시를 느끼고 싶어서였다. 숙소에서 나와 하릴없이 시내를 걷다가 사진을 찍고,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레이캬비크 주민들의 일상을 바라보았다. 전 세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다는 나라, 국민 열 명 중 한 명은 작가인 나라, 크리스마스에 서로에게 책을 선물한다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책사랑은 거짓말이 아녔다. 서점에서나 카페에서나 나는 손에 책을 들고 있는 남녀노소를 보았다. 백발에 돋보기를 쓴 노인이,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엄마가, 솜털이 보송한 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전철이나 버스나 카페에서나 길에서나 오직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도시 곳곳에는 작은 서점이 즐비했는데, 서울로 치면 명동 한복판 기념품 가게 위층에 서점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은 모퉁이 카페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책 읽는 레이캬비크 사람들, 책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 풍경은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추억을 기억을 간직하고 지킬 수 없는 것일까. 서울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건물주에게 쫓겨난 공 씨 책방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미래유산으로 지정되면 뭐 하는가. 대한민국은 부동산 투자를 위해서라면, 돈이 된다면, 미래를 위한 과거의 유산이 되는 오래된 건축물 따위야 당장 갈아엎어도 때려 부수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천박한 사람들의 나라다. 건물주의 횡포와 부동산업자들의 돈놀이에 몸살을 앓는 서울 한복판에서 경리단의 포린 북 스토어가 한 자리에서 여전히 명맥을 지키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책방 주인이 집을 소유해서다. 명륜동에 있었던 풀무질 책방이 떠오른다. 치솟는 임대료에 책방을 여기서 저기로 옮기면서도 성대 앞 유일한 인문사회과학 책방의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고자 애썼던 주인장의 얼굴이. 그리고 몇 년 전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고 침통한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는 그가 제주도로 터전을 옮겨 작은 책방을 다시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이태원에는 '왔더 북'이라는 서가도 널찍하니 분야별로 구분해 깔끔하게 책을 진열한 세련된 영어 전문 서점이 있다. 신간뿐만이 아니라 중고 서적까지 두루 갖춘 현대적인 매장이 그것도 두 군데나 이태원에서 성업 중이다. 이제 외국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포린북 보다 왔더 북을 더 찾는다.


하지만 경리단 길목 포린북 책방 같은 세월이 담긴 공간을 시간이 묻어나는 장소를 이태원의 역사를 기억하는 주인장을 어디서 만날 수 있겠는가. 어릴 적 가난한 형편에 책을 사서 볼 수 없었을 때 도서관과 더불어 헌책방은 내게 유일한 구원처였다. 케케묵은 책더미 속에서 옛책을 들쳐보며 모르는 이의 글씨체에 상상의 나래를 펴고 출판 연도를 읽어 내려가며 이미 없어진 출판사 세상을 뜬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 숨겨진 보물찾기 하는 그 기분은 경험을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


"우리는 영어로 쓴 모든 책을 사고 팝니다."


여든까지는 책방문을 매일 열고 닫을 수 있다고 그 자리를 지키겠노라 다짐하는 주인장. 경리단의 부동산 광풍에도 가게를 팔고 건물을 넘기지 않은 주인장의 꼿꼿한 자존심. 자본과 돈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 그의 철학. 책방이 자신이 살아온 역사이자 정체성이자 책이 존재의 이유가 된 한 인간의 품격을 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이 걱정스럽다. 지금이야 주인이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책방을 지키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훗날 주인이 세상을 뜬 후에 자식들은 이 책방을 건물을 그대로 책방으로 둘 것인가라는 의구심에.......


아아, 할 수만 있다면 수중에 돈이 있다면 내가 책방을 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공간을 이 장소를 사라져 가고 잊혀가는 것을 꼭 지켜내고 싶다. 돈 많은 부자를 부러워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런 순간만은 내가 정말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ㅡ얼마 전 우연히 경리단을 지나다가 책방이 사라진 걸 봤다. 어르신 돌아가신 걸까?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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