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과 행복

by 홍재희 Hong Jaehee

하나.


나이 들수록 친구들과 만나는 횟수가 차츰 줄어든다. 다들 먹고사는 일에 치여 사는지 연락도 뜸해졌다. 친구들마다 사는 곳도 천차만별이라 다른 도시에 사는 친구는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게 다다. 어릴 적에는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기를 쓰고 만났지만 이제 얼굴이라도 보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한다. 어쩌다 보니 결혼하고 애가 있는 친구들은 결혼한 친구들끼리 싱글들은 싱글들끼리 만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생활 반경이 서로 달라지고 삶의 방식이 달라지면 알게 모르게 만나는 이들도 달라지게 된다.


​연말연시에 여기저기 떨어져 사는 벗들을 만났다. 연례행사처럼 일 년에 한 두어 번 길게. 전부 각자 혼자 살고 있으니 서로의 집을 방문하거나 수다를 떨면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거나 한다.


​친구들의 얼굴에 삶이 안겨준 진득진득한 고뇌와 불안, 피로가 뚝뚝 묻어 나온다. 한 친구는 이십 대부터 자립하여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도 여전히 쪼들리는 제 현실이 허탈하다고 했다. 누구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누구는 여기저기 고장 나는 몸뚱이에 노화를 실감하며, 누구는 지긋지긋한 노동 좀 그만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한탄하며, 누구는 술을 마시다 흘러나온 노래에 눈물이 터지고 만다. 다들 꼬일 대로 꼬이고 풀리지 않는 우울한 현실에 답답해하며 서른, 마흔이 넘어도 왜 삶이 달라지지 않는지 되묻는다. (친구야. 그걸 알면 내가 너와 술을 마시고 있지 않겠지.....)


나이 들어가는 우리들 대화에 새로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들. 초고령화 사회. 백세시대. 고독사(나는 고독사라는 말을 싫어한다. 고독에 대한 모독이다. 엄밀하게 말해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 소외 사라고 해야 된다.) 존엄사. 나이 듦. 노화. 비혼. 먹고사니즘. n-잡러. 생활동반자. 1인 가구. 대안가족. 공동주택 등등.


근데 그거 알아? 한국 사회에서 '가난한' '싱글' '여성'이 사회 극빈층을 형성한다는 사실? 나이 먹고 늙어서 뭐 하고 먹고살지 생각만 해도 불안하다. 우울하다. 우울해. 새해는 좀 행복하고 싶다! 고 부르짖던 친구는 내게 타로로 새해 연애점을 봐달라 했다. 한편 또 다른 친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다. 다들 젊다 젊어. 연애할 체력이 어딨냐.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는 나는 연애는커녕 잠잘 시간도 부족해. 하루라도 빨리 벌어 빚 갚아야 하는 사람한테는 사랑도 사치야. 언제 적 연애냐...... 그냥 넷플릭스에서 '나는 솔로'나 봐야지. '피지컬'100‘ 이 더 재밌어. 그래, 그거나 보자.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듯이 우울이 마치 공기처럼 삶을 영혼을 잠식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주변에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이 꽤 된다. 항우울제를 먹는 벗들도 있고 나 역시 수술 후 처방받은 적이 있으니 우울증이란 일종의 유행을 지나 이제 우리의 일상이, 불안과 함께 시대의 공기가 되었다. 모두의 마음속에 헬조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혼자 살기는 외롭지만 함께는 두렵고 같이 있다고 우리의 미래가 더 나아질 거라는 확신도 없다는 것을. 그러나 사람인지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더불어 함께 살고 싶다는 희망과 꿈을 그 끈을 놓아버릴 수는 없다.


둘.


나는 '부자 되세요'라는 말만큼이나 '행복하세요'라는 말이 싫다. 타인을 위한 덕담과 기원이 고작 돈 밖에 없는 천박한 속물근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한국인 우리들의 민낯이 부끄럽게 느껴지고, 내 행복마저도 사회와 타인의 기준에 좌지우지되는 것 같은, 행복을 강요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다들 행복하지 않으면 마치 대단히 잘못된 듯, 큰일 날 듯, 인생 종칠 것 같은 분위기다. 대한민국은 행복도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가 되어버린 사회, 행복에 집착하고 행복에 과몰입하는 행복강박증 사회다. 말 그대로 '행복' '웰빙' '힐링' 지상주의 시대인데, 하지만 정작 '행복'한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모두가 행복해지려고 기를 쓰고 안달복달하는 사회에서 오히려 불안과 우울이 시대의 공기가 되었다. 아이러니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도대체 '항상' 행복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 정말 가당키나 한가?


​사전을 찾아보니 행복이란 삶에서 기쁨과 만족을 여기는 상태 또는 복된 좋은 운수라고 나온다. '행'이란 한자어에는 죽음을 면하다는 뜻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운수라는 의미인 셈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기쁨을 느끼는 이는 거의 없을 것 같다. 둘러보면 대부분 뭔가가 없어서 뭔가를 가지지 못해서 뭔가를 이루지 못해서 불행해 보인다.


만일 행복하다는 것이 '잘' 산다라는 말과 동의어라면, 그런데 그 '잘' 사는 것이 바로 돈 많은 것 성공하는 것 남보다 잘 나가는 것이라면 그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질 수 없으며 결핍은 해소되지 않는다. 만일 그처럼 행복이란 것이 조건부라면 그래서 우울하고 절망하고 고통스럽다면 그 행복은 뭔가 이상하다. 달성해야 할 목표와 조건을 행복이라고 조장하는 사회, 결핍이 우울증을 불러일으키는 사회는 어딘가 잘못되었다.


난 남들이 말하는 그 행복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남들이 말하는 행복에는 관심이 없다. 내게 행복은 무엇 무엇을 갖추어야 (행복한) 조건이 아니라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보다는 안녕이다. 평안하고 만족한 '마음' 그거면 된다. 지금 어떤 걸 소유하고 유지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한 '상태'. 기쁨이고 즐거움이면 족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들 역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상처받을 때, 아플 때, 고통스러울 때는 매우 슬프고 몹시 우울하다. 그러면 또 생각한다. 대체 지금 내가 우울하면 안 될 건 뭔가. 슬픈데 슬퍼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잖아. 힘들고 아픈데 아파하는 건 당연하잖아. 펑펑 엉엉 울어야 후련하잖아.


삶은 원래 모호하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외롭고 불안한 것이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 날이 있고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시시각각 변하는 게 당연지사. 어떻게 언제나 맑음 상태일 수가 있겠는가. 지금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지금 당장 희망이 보이지 않는 데 어찌 괴롭지 않을까. 어찌 절망의 파고에 휩쓸리지 않겠는가.


그럴 때 나는 혼자서 꺼이꺼이 크게 소리 내어 운다. 속이 후련해질 때까지 폭풍우가 모조리 남김없이 바닥을 휩쓸고 갈 때까지 울다가 지칠 때까지 울고 또 운다. 그러고 나면 내가 무엇 때문에 울고 있었는지조차 희미해지는 순간이 온다. 코가 시뻘게질 때까지 울고 나면 한결 속이 차분해진다. 마음이 텅 비어 깃털처럼 내려앉는다. 짓눌린 영혼의 무게가 1그램은 가벼워진 듯하다.


감정은 파도와 같아서 외부에서 바람이 불면 물결치고 풍랑이 인다. 어쩔 수 없다. 그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지그시 들여다볼 수밖에.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마종기 시인의 시처럼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ㅡ마 종기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 뜨고 해 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 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 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