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전화 한 통

by 홍재희 Hong Jaehee




최근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한 지인에게서 문자가 왔었다. 답장을 할까 말까 하던 차에 까먹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문자 정리를 하다가 또다시 그네의 문자를 보게 되었다. 마음에 걸려서 뒤늦게 문자를 쳤다. 고맙다고 난 바쁘게 잘 지낸다고. 문자를 보내자마자 띠리링 전화가 왔다.

그네였다.

스물 언저리 꽃다운 나이에 만난 것 같은데 이제 그네는 서른이 훌쩍 넘어 아이 둘의 엄마란다. 하긴 그네가 아이를 배고 낳고 벌써 다섯 해가 흘렀다. 그 순간 엉뚱하고 순진했던 그네의 고운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첫 아이의 돌잔치에 간 이후로 그네와 한 번도 연락을 해본 적이 없다. 마음을 터놓을 만큼 곁을 준 벗도 아니었고 수시로 안부를 물을 만큼 가깝지 않았다. 사실 내가 전화든 문자든 연락을 자주 하는 성격도 아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네의 음성은 여전했다. 발랄하면서도 어딘가가 시큰둥하고 께느른한 특유의 목소리. 그네는 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에 복직하고 나서 어느 날 불현듯 내가 생각났다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우리가 예전에 지금보다 더, 더, 어렸을 적 잠시 만나 놀았던 그때가 그립다면서 언제 점심이나 먹자며 한 번 보자 했다. 나는 의례적으로 '시간 나면 그럽시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언니 지금 어디 가요?'

'아, 저, 집에 가는 길인데요.'

내 말에 상기된 목소리로 그네는 당장 만나자고 했다. ​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지금요? '

내가 뭐라 묻기도 전에 그네는 덧붙였다.

'남편은 자기도 약속 있어 나갔어요.'

'시간이 늦었는데... 애... 애는?'

'애는 부모님께 맡길 수 있어요. 언니 어디 살아요? '

그네는 다짜고짜 내가 사는 곳을 물었다.

차가 있으니 내 사는 데까지 올 수 있다는 여전히 발랄하지만 어딘가가 조급한 그네의 목소리. 하지만 나는 왠지 뜨뜻미지근했다. 그네의 남편과 애와 기타 등등을 그녀 대신 신경 쓰고 있는 나 자신과 오랫동안 소식 없던 그네가 오늘 밤 갑자기 차로 이곳까지 오겠다는 마음이..... 기쁘고 설레고 반가워야 하는데 그래야 는데 괜스레 불편해지고 서글퍼졌다.

금요일밤 술친구를 만나러 나간 그네의 남편과 애가 어느 정도 커 여유가 생겼어요 이제는 놀 수 있어요 하며 다급하게 번개를 치는 그네를 동시에 생각하며.

나는 거짓말을 했다. 미안하지만 사실 오늘 밤에는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어요. 내 대답에 저으기 실망했을 그네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나 좀 봐. 맞다. 불금인데. 언니 약속이 있구나. 언니가 만나는 친구들은 다 싱글이죠?라는 그네의 목소리에 애처롭게 묻어나는 그 무언가를 떨어내고자 나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심히 지나치는 행인들과 경적을 울리며 달려가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부모가 된다는 것. 남편과 아내, 여성과 남성의 차이 그리고 결혼과 인생. 나는 영화 '비포 미드나잇'과 '레볼루션 로드'와 '결혼이야기'를 생각한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이 듦이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와 달리 죽는 그 순간까지 엔딩이 없다는 것. 실제 인생은 영화의 엔딩 이후에 진짜 시작한다는 것을. 현실은 로맨스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끄덕 주억거리는 것. 스크린 뒤에서 벌어지는 짜고 쓰고 매운 현실을 헤아리게 된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몰라도 됐던 것들을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모른 체 하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제스처 하나가 곧 하나의 의미만은 아니라는 것을 쓴웃음을 짓는 순간에도 담담히 깨닫는 것이다.

그네도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금요일밤 남편이 놀러 나간 밤에

집에서 혼자 아이와 남아​

남편을 따올리며

속상했을까 서운했을까 미웠을까.​

그네는 전화를 돌리고 카톡을 날리며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친구를 사람을 찾았을까.

그래서 아이를 맡기고 신이 나서 불금을 보내려 나갔을까.

아니면 보채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잠을 재운 뒤 어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밤을 새우고 또 새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