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록 14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거의 이틀을 보내게 되면서 공항 세관을 지날 때 여권에 꾹! 입국 도장을 받았다.
그 강렬한 스탬프의 추억.
지난 3년간 겨울마다 호주 멜번에 갔지만 한국과 호주 간에 전자 여권 제도를 체결한 이후 한 번도 출입국 허가 도장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여권을 스캔하고 알아서 얼굴을 식별하여 자동으로 문 열어 주는 시스템. 세관에서 오래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성가신 질문을 받거나 대답을 못할까 봐 졸 이유가 없어서 더없이 편리하고 빠른 21세기 LTE 처리. 그런데 어쩐지 허전했다. 외국을 처음 방문할 때 공항에서 느끼는 두 근 방세근방 그 가슴 설렘이 전혀 없어서. 낯선 곳 모르는 문을 두드릴 때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지 않아서.
멜번을 세 번이나 오고 갔건만 새로 만든 여권에는 도장 하나도 없이 깨끗한 백지였다. 제 아무리 많은 나라를 전 세계를 돌아다닌들 전자여권 인식 제도로는 내가 어디를 가고 어디를 여행했는지 여권을 들여다봐도 알 길이 없다. 오직 '빅 브라더'인 시스템만이 데이터로 나의 여정을 확인하고 감시할 뿐이다.
여권에 찍힌 무수한 사증과 출입국 도장을 보고 언제 어디서 어디를 여행했었는지를 떠올리는 즐거움도, 각 나라마다 제각각 다른 출입국 도장 디자인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여권을 펼쳐보며 지난 여정이 알려주는 여행 이야기를 추억하는 시간도, 그렇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넘기며 느끼던 아날로그 감성은 사라졌다. 뭔가 허전하고 어딘가 쓸쓸했다. 적이 허했던 내 맘을 알았던 걸까.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예정에 없던 하루를 보내게 되면서 새 여권에 처음으로 도장을 받았다. 일기장의 첫 장을 펼쳐든 기분이다. 여권에 찍은 도장과 날짜가 내게 말을 건다. 테리 마 카시.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만료 여권을 꺼내 정리했다. 여권 하나하나에 도장 하나하나에 그동안 내가 스치고 거쳤던 여러 나라들의 이야기 내가 주인공인 영화가 담겨있다. 그때 거기서 일어났던 내가 보고 듣고 만나고 겪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연주하는 여권. 여권 도장은 내게 일기장이며 여행기다. 그래, 여권에는 도장을 꾹 찍어야 제 맛인 거야. 그래야 여행을 '한다' 또는 여행을 '했다'는 실감이 나지. 앞으로는 여권에 도장 꼭꼭 찍어주는 나라들을 여행해야지. 이럴 때면 난 영락없이 아날로그 인간이다.
여권마다 붙어있는 내 얼굴에 세월이 소리 없이 흘러간다. 문득 내 얼굴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똑 닮았다는 걸 깨닫는다. 나이 들수록 이번에는 어머니를 좀 더 닮아가는 것 같다. 젊어서는 아버지 늙어서는 어머니를 닮는 삶이라. 괜찮은 듯하다.
여권 정리를 하다가 상자 속에서 온갖 엽서꾸러미가 튀어나왔다. 여행 다닐 때마다 주워 모은 것들. 가난한 배낭여행자는 기념품으로 각 나라의 엽서를 가방에 넣었다. 무게도 부피도 차지하지 않고 집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여행지의 추억 중 최고가 아니었을까. 상자 속에 처박아 놓고 오랜 시간 잊고 살았다. 아아, 추억이 봇물 터지듯 밀려온다. 물결을 헤치고 나는 추억으로 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베트남 지폐 동. 베트남은 간 적이 없는데 이 돈은 도대체 누가 준 것일까. 어디서 얻은 것일까. 아무리 곱씹어봐도 생각나질 않는다. 조만간 언젠가 가게 될 거야 아니 가고 말리라. 베트남을 내 여행목록에 올려놓는다.
ㅡ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창문을 활짝 열고 대대적으로 서랍장을 한 번 정리해야겠다. 사진첩과 일기장과 여행엽서를 전부 모아서, 지나가버린 추억을 감상하는 하루를.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사라진 이야기를 되살려 웃고 울고 꿈꾸다가 희나리처럼 옛사랑을 불사르리라. 화창한 어느 봄날 오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