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나는 이 세상에 나를 닮은 존재 내 유전자를 남기고 싶지 않다.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빈 손으로 떠나길 원한다. 그저 한 점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먼지저럼 사라지기를 원한다.
어렸을 때부터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았다. 꾸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맘을 먹었는데 나이들면서 점점 확고해졌다. 함께 밥 먹고 돌보고 아끼는 사이라는 의미에서 식구는 좋았지만 피붙이라는 의미의 가족은 싫었다. 동거동락하는 인생의 동반자는 원했지만 전통적 의미의 혼인관계와 남녀 역할에 얽매이는 건 더 싫었다. 독신은 말 그대로 홀몸, 가족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어서 싱글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원해서 선택한 확신범이다.
주위에 친구들이나 지인들 중에도 독신이 많다. 대개 성인이 되어 학교 직장 등등의 이유로 물리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한 후 혼자 사는 이들이다. 스스로 독신을 선택한 이도 있지만 그 중에는 일명 결혼 적령기라는 혼기를 놓쳐서 싱글로 사는 경우도 있고 이혼 후 다시 싱글이 되어 돌싱으로 혼자 사는 이들도 있다.나와는 달리 자의반 타의반 어쩌다 비혼이 된 이들인 셈. 여하튼 대개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해져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편이다. 다만 그 중에서는 지금이야 젊으니까 혼자 잘 살고 있지만 늙어서도 앞으로 혼자 산다면 어쩌지? 하고 겁내는 이들도 꽤 된다. 나 이렇게 살다가 혼자 죽으면 어떡해? 고독사하면 어떡해? 독거노인이 되어 혼자 죽으면 어떡하냐고...... 늙어서 아프고 병들면 아무도 옆에 없으면 서럽고 두렵고 무섭다는데.....라면서.
아버지는 '혼자' 죽,었,다. 아침 여덟시. 방에서 잠자던 아버지가 숨을 거둔 그 순간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남동생은 일찍 출근했으며 바다 건너에 사는 언니는 한밤중이라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따로 사는 나는 전날 마신 술에 뻗어서 숙취에 시달리며 잠들어 있었다. 가족이 있었어도 죽는 순간에 아버지는 혼자였다. 결국 죽어가는 아버지의 고독을, 살아있는 사람들인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병으로 죽어가던 사고로 죽던 어떻게 죽던 간에 죽음을 앞둔 자의, 임종 그 순간을 그처럼 느끼고 그와 함께 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죽는 건 내가 아니라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가 죽는 순간에도 똑같을 것이다. 내 옆에 사람이 가족이 있건 없건 간에 그 순간은 오롯이 나 밖에 없다.
결국 사람이 죽는다는 건 유일무이한 혼자만의 경험이다. 아무리 가까워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대신 해줄 수 없고 똑같이 느낄 수 없는 게 두 개 있다. 하나는 병에 걸린 고통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불평등한 이 세상에서 부자 빈자 할 거 없이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공평한 게 하나 있다면 죽음 하나뿐. 죽는다는 건 세상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찾아오지만 남과 나눌 수 없는 오직 혼자만이 겪는 경험이 아닌가. 살아있는한 알 수 없다. 죽는 순간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상태가 되는 건지 어떤 마음이 드는 지는 죽어 보기 전엔 절대 알 수 없다.
어느 책에서 자연사를 정의하기를 '사회적 개념으로 아름답게 죽는 것으로 자연에 맡겨 방치된 죽음이 아니'라고 했다. 그 말에 왠지 꼬투리를 잡고 싶다. 이상하지 않은가. 말그대로 '자연' (!)사인데 자연 그대로 사람의 개입 없이 죽은 죽음은 왜 자연사가 아닌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길 위에서 단숨에 그리 죽음을 맞는데 말이다.
인간이 만든 사회적 규범은 '자연스럽게' 방치된 죽음을 '고독사'라고 명명하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로 집에서 죽음을 맞는 것을 '자연사'라고 부른다. 다시말해 자연사란 '본인이 죽는다는 걸 자각할 것, 가족 본인 모두 죽음에 대비하고 있을 것, 법적 경제적 준비가 되어 있을 것, 본인의 사회적 책임이 종결되어 있을 것, 주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마칠 것'이 조건이란다. 결국 인간 사회에서 의미하는 '자연사'란 한 개인이 홀로 죽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가족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이런게 자연사라면 요즘 세상에 자연사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자연사 대신 고독사가 누구나 맞이할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건 자연사가 아니라 '사회사' 가 아닌가?
그렇다면 자연사든 사회사든 요즘 이렇게 죽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될까?
잠깐 동네 수퍼에 다녀오니 이미 눈을 감은 경우도 있고, 병실에서 간병하다가 잠시 집에 다녀온 사이 임종했다는 연락을 받는 가족도 부지기수다. 이제 미래에는 가족이 있어도 요양병원에서 홀로 죽음을 맞는 이들도 허다할 것이다. 가족이라고 같이 산다고 해서 임종을 함께 하는 것도 아니다. 요즘처럼 가족끼리도 각자 바쁘고 각자 사는 현실에서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손주들까지 한자리에 모여있을 때 임종을 맞는 행운은 꿈에도 누리기 어렵다. 로또 복권 당첨보다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연속극 대가족 코스프레에서나 볼 수 있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 하늘에 별 따기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와 같이 준비된 임종은 호스피스 암병동이거나 시한부 생을 선고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나 아니면 스스로 선택한 존엄사에나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부모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괜한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 죄책감마저도 사실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감정이다. 장례가 고인을 생각하는 산 자들의 자리이듯이 임종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결국 살아있는 자들의 책임감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뒤 남겨진 사람들, 살아있는 사람들, 망자의 가족들을 위한 것이다. 임종에 참석해야한다 또는 하고 싶다는 결국 죽는 자를 위한 게 아니라 산 자와 남은 가족들ㅡ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보면 고독사라고 불리는 홀로 ㅡ죽음, 역시 죽은 자의 마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산자들의 추측이고 상상일 따름이다. 내가 혼자 죽던 아니던 간에 죽는 그 순간 내 마음이 평온하다면 내가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내 죽음을 남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이 고독사로 부르던 말던 대관절 무슨 상관인가. 나 죽은 뒤다. 죽은 자는 죽어서 알 리 없으니 그 또한 좋다.
추석이나 설날 같은, 가족과 함께 한다는 명절에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하는 홀로 시간을 보낼 사람들을 떠올린다.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알게 된 진실.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다 보면 세상이 온통 아픈 자들,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들, 죽어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병동 옆에 장례식장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이 곳은 삶이 끝나면 곧바로 죽음으로 직행하는 곳. 그것이 일상인 공간. 산소호흡기 또는 투석기를 달고 휠체어를 밀며 침상을 오고 가는 환자들을 보며 죽음 속에서 산다는 것, 삶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성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