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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1

by 홍재희 Hong Jaehee




석 달만에 돌아온 정기진찰일.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 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병자고 환자다. 현대 사회에서 병원만큼 삶의 진실, 생로병사를 깨우치게 해주는 공간이 있을까. 병원에 있다보면 도처에서 불행과 마주치게 된다. 병원 밖은 화창한 날씨에 길거리에는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청춘이 있고, 입가에 웃음이 만발한 단란한 가족이 지나가지만 불과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병원에는 불의의 사고로 휠체어를 타야하는 청춘이 있고, 아픈 자식을 데리고 눈물짓는 부모가 있다. 맑은 날씨에도 불행은 있고 흐린 날씨에도 행운이 있고......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다.


새옹지마.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불행은 이유없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무슨 잘못을 저질러 이런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다. 오늘은 행복하지만 내일이면 먼지처럼 흩어지고 마는 게 삶이다. 인간의 어리석음. 주변의 다른 사람이 넘어지는 걸 보았으면서도 우리 자신은 괜찮을 거라고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 다음이 내 차례인 것도 모른 채. 그러다가 갑자기 발 아래 땅이 꺼진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 역시 다칠 수 있으며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덧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내 삶이라고 남보다 더 값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어머니와 같은 병실을 쓴 할머니는 여전히 병상에 누워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일어나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다. 소변도 혼자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죽고 싶다고 한탄하던 할머니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진다. 병동은 거의 노인들 투성이. 사방이 노인이다. 반신불수던,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던, 휠체어를 타던, 보조기를 차고 있던, 남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거동하지 못하는 이들, 거개가 칠십 대 이상. 어머니왈 옛날 같으면 벌써 죽었어야 할 늙은이가 약이 좋아져서 이렇게 살아있단다. 머리가 허옇고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들 틈에서 문득 내 미래를 생각했다......다르지 않겠지.




노인이 된다는 것. 늙는다는 것. 죽는다는 것. 피해갈 수 없다. 주변에서 나이가 몇인데 무슨 벌써 늙는 걸 생각하냐고 한다. 우울하다며 죽는 걸 생각하는 것조차 싫다며 손사래를 치는 친구도 있다. 현대인은 죽음과 친하지 않다. 거부된 죽음은 은폐되고 유배된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언제나 죽음을 생각한다. 이 말은 삶에 염세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죽음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현대인의 기대 수명이 늘어난 것이 축복일지 저주일지는 죽음을 어떻게 사유하고 성찰하며 받아들일지에 달려있다. 혼밥 혼술 혼잠이 일상이 되어가는 요즘 앞으로 홀로 죽음도 우리 사회 우리 삶 내 인생의 일부가 될 것이므로.



"내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저 내 속에 죽음이 들어 앉아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죽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 미셸 투르니에



https://www.youtube.com/watch?v=iHB_YWIWk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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