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록 1
없을 때일수록 더 여행을 떠나라. 물론 지금은 돈도 없고 여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돈과 여유가 생기면 떠나겠다고 하지만 그때는 시간이 절대로 부족하다. 막상 그 때가 오면 가볍게 내려놓고 떠나기에 소유한 것들이 너무 많아진다.
나는 항상 돈이 없었다. 부족했다. 그래도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난 나에게 사람들은 부럽다고 했다. 그들은 내가 돈과 여유가 많아서 떠났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떠나본 사람은 안다. 일단 떠나기가 어렵지 집을 떠난 후에는 쉬워진다는 것을. 시간으로 돈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돈이 없어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길은 어디로든 통해 있고 삶은 어떻게든 흘러가게 마련이라는 것을.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떠나는 것이다. 다리가 떨릴 때면 이미 늦다. 한 살이라도 더 어렸을 때 떠나라. 작년에 맨 가방과 올해 멘 가방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가방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지 않을 때 더 젊을 때 떠나라. 좀 더 덜 먹고 좀 덜 자고 돈을 더 적게 들이고 좀 더 몸고생 마음 고생을 하고도 고생이 고생이 아닌 나이다. 그럴 때 떠날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계획하지 않고 발 길 닿는 대로 혼자 헤매는 여행. 길 위에서 사람은 강해진다. 돈이 넉넉하지 않아도 여유로워진다.
나는 어제도 떠나고 싶었고 오늘도 떠나고 싶다. 아마 내일도 떠나고 싶을 것이다. 역마살이 낀 사람들 모두가 그렇듯이. 떠나고 싶을 때 나는 책장에서 지도를 꺼낸다. 손 때 뭍은 여행서 론리 플래닛을 읽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봤던 곳들과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의 이름들을 나즉히 읊조려본다.
아아, 그 이름들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추억의 냄새. 기억의 소용돌이, 그 가슴앓이. 순간 나는 해석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긴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낯선 땅에서 길을 잃었을 때 자유로웠던 나는, 오히려 너무도 익숙한 거리와 낯익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 외로이 섬처럼 갇혀 살고 있으므로.
지금 당장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 떠나라. 여행에서 귀향한 가난한 자에게 남은 거라곤 싸늘한 타인의 시선과 늘어난 카드빚일지라도. 죽음을 앞둔 인생에서 남는 건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이고 추억이며 향수다. 결국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