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에 탈이 나서 한동안 음식을 철저히 가려먹어야 했다. 병원에서 먹지 말라는 게 너무 많아서 사실상 외식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난달은 툭하면 죽을 먹었다. 처음엔 본죽을 사 먹었다. 저염 무염식으로 주문했다. 하지만 만 원이 넘는 본죽을 매 끼니마다 먹을 순 없는 일이었다. 통장 잔고가 투투둑 사정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외식 대신 마트에서 파는 포장죽을 사다 끓여 먹었다. 그런데 인스턴트 포장 죽은 짜서 물을 붓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었다. 속이 더 안 좋아졌다. 난 내 돈 주고 본죽 같은 거 사 먹는게 제일 돈 아까워.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죽을 돈 내고 사먹어? 죽은 외식할 음식이 아니라던 친구가 떠올랐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약을 먹고 있는데도 부어오른 위장과 속 쓰림 통증과 소화불량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위내시경을 받아보라 했다. 내시경을 받으면또 스트레스성 위염이라는 뻔한 진단만 나올 것이다. 이번에는 헬리코박터 균이 있을지 모른다 해서 검사를 받았는데 위장에는 균 하나 없이 깨끗했다. 돈만 날렸다.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약으로도 듣지 않는다면 먹는 방식과 밥상 자체를 바꿔야 했다. 인터넷을 뒤지고 책을 펴 들고 내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직접 만들어 먹기로 했다.
위장점막과 위궤양에 좋은 마. 시장에서 마를 샀다.. 내가 돈 내서 마까지 사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요즘은 두릅 철이다. 봄 향기가 그윽한 더덕과 두릅도 한 봉지 씩 샀다.
마를 씻고 자르고 껍질을 벗겨내다가 피부에 닿은 부위가 붉게 일어나 가려워 죽는 줄 알았다. 이게 무슨 일이람! 깜짝 놀라 검색해보니 마 알레르기란다. 장기능이 안 좋거나 장이 약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상. 장도 안 좋으니 바로미터군. 마 알레르기가 있는 걸 처음 알았다. 이래서 또 하나 배운다.
마로 따로 반찬을 만들기 너무 번거로워서 꾀를 냈다. 밥을 지을 때 마를 얹어 마밥이나 마죽을 해서 먹는다. 마트에서 파는 인스턴트 죽보다 속이 훨씬 편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뭐든 과하면 안 좋은 법. 과유불급. 마 역시 소화력이 약한 소음인이 많이 먹음 안 좋고 더덕은 성질이 차니 둘 다 양을 조절해야 한다. 쌀죽 단호박죽에 마죽까지 했으니 다음엔 속을 보하는 좁쌀죽 흑임자죽 버섯죽 미역죽 양배추죽을 만들어봐야겠다. 심심하고 맹맹한 죽으로 끼니를 먹으려니 꾀가 는다. 죽의 신세계 입문.
당분간 밥상에서 국과 찌개를 없앴다. 위장장애에 시달릴 때는 국물요리가 상태를 더 악화시킨다. 국과 찌개 없이 살려니 머리를 굴려야 했다. 덕분에 집에서 날마다 요리 도전을 하고 있다. 잘 먹고 잘 살려면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된다. 죽만 먹다가 살이 2kg나 빠졌다. 누군 살쪄서 고민 다이어트 한다고 난리들인데. 여기서 더 빠지면 여름 못 난다. 이래 가지곤 무더위에 기력이 달려 못 산다. 소화가 잘 되면서도 균형 잡힌 식단을 차려 먹어야 한다.
매번 죽만 먹자니 너무 심심해서 온갖 채소로 나물 밥상을 꾸린다. 밥상에서 붉은색이 모조리 사라졌다. 들기름 비빔밥으로 죽으로 밍밍해진 입맛을 돋운다. 머위 달래 방풍나물 취나물 돌나물 참나물 등등 나물의 향연. 장 보러 갈 때마다 이번엔 또 무슨 나물이 나왔나 들여다보는 게 일과가 되었다.
스트레스성 위염, 장염, 역류성 식도염, 만성 어깨통증, 허리통증, 말린 어깨와 등. 전부 학원 강사와 영화일을 하면서 시작된 고질이다. 날밤 새고 믹스커피를 연거푸 들이부으며 급하게 밥을 먹고 대충 끼니를 건너뛰고 마감에 쫓기며 시나리오를 쓰다가 어느 날 새벽 숨도 못 쉴 만큼 견디기 힘든 가슴 통증이 찾아왔다. 그게 식도염의 시작이었다. 흡연과 잦은 음주와 불규칙한 식생활을 하던 커피 중독자의 결말. 스트레스를 받으면 새벽마다 위경련과 장경련이 번갈아 찾아왔다. 그 길로 죽는 줄 알았다. 타고나길 비장이 약한 체질이어서 어릴 적부터 급체와 변비 설사를 반복했지만 서른 넘어 찾아온 고질은 차원이 달랐다.
사람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고 강한 부위와 약한 부위가 있다. 나이 들어 과로하고 기력이 달려 면역이 깨지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타고난 약한 데가 제일 먼저 고장 난다. 천하장사도 예외 없다. 아킬레스 건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무 때나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먹어대던 식욕, 쇠도 씹어먹을 튼튼한 위장, 며칠을 밤샘해도 지칠 줄 모르는 깡다구를 자랑하던 체력은 이십 대가 최고치다. 사람마다 운이 나쁘면 삼십 대부터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사십 대 이후 이십 대처럼 살다가는 한순간에 블랙아웃이다.
속이 쓰릴 때마다 양배추를 과자처럼 간식처럼 뜯어먹고 지낸다. 하루에 반통은 먹는 것 같다. 풀 뜯는 염소가 되었다. 똥마저 풀색이다. 요즘 친구에게 얼굴 좋아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웃겼다. 몸에 나쁜 건 하나도 안 먹고 사니 청정한 몸뚱이가 된 덕이랄까. 이 참에 글 쓰면서 물 마시듯 커피 마시던 버릇이나 없애야겠다. 낙이 사라졌지만 다른 낙을 찾아봐야지. 앞으로도 계속 글 쓰고 영화 만들고 일하고 살려면. 이래서 또 배운다. 잃는 것도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자기 몸 살리기를 잘해야 나도 살고 남에게 민폐도 안 끼치고 남도 살린다.